천년고찰, 김천 황악산 직지사

2024. 1. 5. 05:50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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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00대명산, 백두대간 황악산"


수질악화로 사라진 한국 100대 명수 김천 직지사 약수정


"김천 황악산 직지사 일주문"


[김천 직지사]

황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들어낮은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천년고찰로,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한 사명대사가 출가한 사찰로 유명하다.

김천 직지사 전경(육화당,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대웅전, 심검당)


[보물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聞慶 道川寺址 東·西 三層石塔) East and West Three-story Stone Pagodas from Docheonsa Temple Site, Mungyeong]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여진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도천사지 서삼층석탑과 대웅전"


[보물 김천 직지사 대웅전 (金泉 直指寺 大雄殿) Daeungjeon Hall of Jikjisa Temple, Gimcheon]

김천 직지사 대웅전은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까지는 좌측의 계곡을 끼고 지형에 맞추어 휘어져 올라온 북쪽에 위치하며, 만세루(萬歲樓)에서 대웅전에 이르기까지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선당(禪堂)이 위치해 있으며, 대웅전 앞 뜰에는 2개의 삼층탑이 놓여 있는 2탑식 중정형 가람배치를 가진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기법은 조선후기의 건축적 특징이 잘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 재건된 불전들의 경향을 보이며, 아름답고 뛰어난 기법을 보여주는 내·외부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는 등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直指寺 大雄殿 三尊佛幀畵) Buddhist Painting in Daeungjeon Hall of Jikjisa Temple (Buddha Triad)]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는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 직지사처럼 대웅전 본존불의 뒷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을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 증명 : 그림이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에 합당한지, 또는 법대로 그려졌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하는 스님을 일컫는 것으로, 그림을 직접 그리는 화원(화사, 금어, 출초, 편수 등)과 구분되어 사용됨

출처:문화재청

[보물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金泉 直指寺 大雄殿 須彌壇) Buddhist Altar at Daeungjeon Hall of Jikjisa Temple, Gimcheon]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은 ‘順治八年辛卯四月 大雄殿 黃岳山 直指寺’라는 1651년 묵서기(墨書記)가 확인됨으로써 대웅전의 중건과 함께 제작된 17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목조 불단임을 알 수 있다. 1668년 작품으로 보이는 삼존불상과 벽화·단청, 그리고 1744년 삼존후불탱화와 함께 예배대상과 한 세트를 이루며 조성된 점에서 조선후기 불전 건축의 내부 장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예이다.

17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편년 자료인 동시에 조선 후기 수미단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소재와 문양들을 장식한 점과 내부에 조각된 고부조의 투각과 화려한 채색법을 통해 조선후기 목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수미단의 장엄과 조각적인 면에 있어 은해사, 운문사, 파계사, 운흥사 등 장엄형 수미단의 계보 형성에 있어 가장 첫머리에 둘 수 있는 당시 불교 목조각의 최고의 정수를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대웅전 창문과 잠금쇠"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변함없는 心 입니다


사명각(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찰인 직지사) 내부 사명대상 초상


[보물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聞慶 道川寺址 三層石塔) Three-story Stone Pagoda from Docheonsa Temple Site, Mungyeong]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3 석탑이다. 1974 대웅전 3층석탑 2(보물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함께 경상북도 문경 웅창마을 북방 금강가의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 올리고 있다.

바닥돌은 넓적하게 짜여져 있으며, 위로 여러 장의 석재를 조성한 2단의 높직한 괴임을 두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개의 널돌로 구성되었으며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한 편으로 밑면의 받침을 5단씩 두었고, 날카롭게 들린 귀퉁이로 인해 경쾌함이 느껴진다.

탑신의 1 몸돌이 2·3층에 비해 매우 높으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한 세련된 모습으로,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스님과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비로전 꽃창살문"


[비로전 천불상]

고려 태조 때 처음 세워져 임진왜란의 피해를 면했던 이 법당은, 그러나 1976년 원래의 옛 건물을 서쪽으로 옮겨 조사전으로 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 옛맛을 잃어버렸다. 안에는 천 좌의 불상을 안치했다. 이 천불상은 고려 초 능여대사가 비로전을 지을 때 속리산의 경잠스님을 시켜 만들었다고 전한다.

법당 하나 가득 앉아 있는 불상들 속에 고추를 내놓은 탄생불이 가운데 서 있다. 법당에 들어설 때 이 불상을 가장 먼저 보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져, 비죽이 웃음을 물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나 온 하늘을 안 듯 큰 합장을 하는 아낙네를 심심찮게 대할 수 있는 것도 이 법당 앞이다. 천불상을 안치한 까닭에 천불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비로전 천불상 탄생불"


"보물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과 황악루"


[보물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 龜尾 江洛寺址 三層石塔) Three-story Stone Pagoda from Gangnaksa Temple Site, Gumi (Presumed)]

강락사라고 전해지는 절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 10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을 탑신(塔身)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이다.

기단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돌로 짜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였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 탑을 옮겨 세울 ,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원래 선산의 낙동강변 원동이란 마을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선산군청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안(移安)된 이 삼층석탑은, 옮겨온 사연도 그렇거니와 그 생김새도 문경에서 옮겨온 세 탑과 거의 같다. 하지만 세 탑보다는 훨씬 안정감이 있고 균형도 잡혀 있어 조형적으로 이 탑이 한층 우수하다. 역시 상륜부는 다시 만들어 올렸고, 지붕돌 모서리나 기단부도 군데군데 수리하거나 보충하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청풍료.성보박물관"


[보물 사인비구 제작 동종 - 문경 김룡사 동종 (思印比丘 製作 銅鍾 - 聞慶 金龍寺 銅鍾) Bronze Bell Cast by Buddhist Monk Sain - Gimnyongsa Temple, Mungyeong]

조선 숙종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장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범종 장인으로 전통적인 한국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지닌 요소를결합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종은 조선 후기의  형태를 가장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같은  만들어진 홍천 수타사동종(보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주위를 화려한 구름형태의 문양을 첨가한 독특한 당좌 형태로 표현하였다.

명문에 의하면  종은 1670 수타사 동종보다 3개월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사인비구의 작품세계와 장인사회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안양 마애범종 및 타종 승려상 탑본

[경기도 유형문화재 석수동마애종 (石水洞磨崖鐘) Rock-carved Bell of Seoksu-dong]

안양 석수동 중초사지 부근의 거대한 바위 면에 새겨진 범종으로 우리나라 유일의 마애종이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자체의 형태와 함께 고대에 범종을 실제로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바위 면에는 장방형의 나무틀에 쇠사슬로 매달린 종과 옆에서 종을 준비를 마친 당목(幢木 ; 종을 치는 나무 막대) 잡고 정면을 향해 있는 승려가 얕게 새겨져 있다. 종에는 유곽 개가 있어 뒷면에 나머지 개를 암시하며, 당좌는 중앙에 원형, 끝에 반원형을 새겨 전체적으로 개라는 것을 암시한다.

얼굴을 아래쪽으로 향한 마리로 표현된 고리와 음통, 유두 9개가 있는 유곽 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범종의 특징이다. 그러나 당좌가 곳으로 늘었고 통일신라 범종의 항아리 모양에서 보이는 유려한 외곽선을 없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고려 시대의 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되나 당좌가 개인 점을 제외하면 고려 시대 범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 양식이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 통일 신라 양식을 반영하여 제작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金泉 直指寺 石造藥師如來坐像) Stone Seated Bhaisajyaguru Buddha of Jikjisa Temple, Gimcheon]

직지사에 모셔져 있으며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불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마모가심해 세부표현을 자세히 살필  없지만, 둥글고 원만한 인상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옷에는 평행 계단식의 무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를 들고 있어서  불상이 약사여래상임을  수가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온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폭이 넓어 맵시있는 모양은 아니지만 덩쿨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있다.

출처:문화재청


[국보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桃李寺 世尊舍利塔 金銅舍利器) Gilt-bronze Reliquary from Sakyamuni Stupa of Dorisa Temple]

경상북도 선산군 도리사에 있는 모양의 세존사리탑 안에서 발견된 육각의 사리기이다.

사리기는 높이 17㎝로 기단, 몸체,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면에 도금이 남아 있다. 평면 육각형으로 면의 기단에 안상을 뚫었다. 몸체의 두면에는 불자(拂子) 금강저를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상을 선과 점으로 새겼다. 남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선으로 새겼다. 이들의 배치는 사천왕상 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상을 배치하여, 다문천이 정면에 있게 보인다.

지붕 처마와 추녀에는 고리가 있어 장식을 달았던 것처럼 보이며 모서리 끝단에는 귀꽃장식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중심에 꼭지만 남아 있어 원래 꽃봉오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귀꽃의 장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서, 8각이 유행하던 시기에 6각형의 사리기가 나타났다는 점이 특이하다.

출처:문화재청


[국보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옥개는 육모지붕의 꼭대기에 상륜이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원통 모양의 작은 기둥이 솟아 있을 따름이다. 이 원통을 가운데 두고 여섯 잎 연꽃이 도드라져 돋았는데 잎 끝은 살짝 솟아 반전을 이루었다. 연꽃잎에서 갈라진 여섯 줄의 귀마루는 물매가 급하지 않은 지붕을 부드럽게 흘러내려 그 끝에 귀꽃을 맺었다. 잎을 셋 달고 뒤로 가볍게 젖혀지며 치솟은 귀꽃들은 작은 몸매에 탄력이 넘쳐나는데, 목에는 무언가를 매달았을 동그란 고리가 하나씩 목걸이처럼 걸려 있다. 고리는 귀꽃과 귀꽃 사이 처마 한가운데도 하나씩 달렸으니, 열두 개의 고리에서 알맞게 늘어진 장식물이 잘랑거렸을 처음의 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황홀해진다.

탑신 각 면의 폭은 5.1㎝, 높이는 11.8㎝이다. 각 면에 새겨진 것은 보살상 둘과 사천왕상이다. 보살상은 금강저를 가진 것이 제석천, 불자를 들고 있는 쪽이 대범천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언가로 단숨에 그어 간 선각과 아주 미세한 점을 연결하여 선으로 만든 점각의 기법을 적절히 섞어서 각 면의 무늬를 새겼는데, 그 선들이 거침없고 유려하게 흘러내리는가 하면 정교하고 치밀하여 여간 숙달된 솜씨가 아니고는 흉내내기 어려울 듯하다. 무늬는 테두리를 두른 선을 살짝살짝 넘기기도 하면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옹색해 보이지는 않으니, 좁은 공간을 배분하고 이용하는 감각도 뛰어나다. 각 면에 보이는 솜씨가 세련되고 능숙하다. 탑신과 분리되지 않고 이어 붙은 대좌는 하대·중대·상대로 이루어졌으며, 중대의 각 면에 안상이 하나씩 투각되어 있다. 모두 모양이 같은 안상은 흡사 도안화된 박쥐무늬 같다. 안상에 보이는 하나의 특징이라면 아랫부분 가운데를 턱을 지워 오목하게 파낸 점인데, 상당히 고식에 속하는 수법이라 한다.

사리병 없이 천과 종이에 싸여 사리함 속에서 함께 발견된 사리는 지름이 1㎝, 높이가 1.3㎝ 되는 원추형이며, 빛깔은 투명하다. 도리사에 새로 세운 사리탑 안에 다시 안치되었다. 이 사리함이 주목받은 까닭의 하나는 그 형태 때문이다. 이제까지 발견된 사리함이 거의 사각을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이 사리함은 육각의 부도형이어서 신라시대의 부도 연구나 목조건물양식 고찰에 귀한 자료가 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성철스님 필 일원상, 송담 스님 필 화두"


"송담스님 필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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