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해골의 전설, 김천 갈항사지

2024. 1. 6. 04:59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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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 수령 418년 김천 갈항마을 남면 오봉리 느티나무


갈항사지 가는 길 우물터 우물물은 마르고 푸른 풀만 자라고 있다.


보물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 보호각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갈항마을 마을분이 문여는 방법을 얄려주셨다.


[보물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金泉 葛項寺址 石造如來坐像) Stone Seated Buddha at Galhangsa Temple Site, Gimcheon]

갈항사(葛項寺) 터에 있는 높이 1.22m 불상으로 군데군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둥근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가슴이 당당하고 허리가 잘록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 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 뿐이며 왼손도 일부 깨졌다.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갈항사 3층석탑의 건립 연대인 경덕왕 15(758)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갈항사지 철창 안 불상"


[연등과 철창 안 불상]

지권인을 한 손 모양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분명한 석불상은 밭 한쪽 알루미늄 철창에 갇힌 채 본래의 머리를 잃고 이물스러운 새 머리를 목 위에 얹은 채 말이 없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갈항사에서 바라본 갈항사지]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효소왕 1년(692)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화엄종의 고승 승전(勝詮)법사가 그뒤 어느 해엔가 여기에 절을 짓고 돌해골[石髑髏]을 청중으로 하여 『화엄경』을 강의했는데 그 돌해골 80여 매가 절에 전해오며 자못 영험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엉뚱하게 바뀌어 절을 지을 때 돌해골로 주추를 놓았다는 전설로 굳어져 전해지기도 한다. 실은 ‘돌해골’이라는 것도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글자 그대로 돌해골로만 해버리거나, 해골이 굳어서 된 화석이라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돌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모두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한때는 전성기 신라 왕실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을 갈항사(葛項寺)의 내력은 앞에 든 일말고는 그리 알려진 게 없다.

일연스님 때는 물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갈항사가 소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엄연히 남아 있었던 갈항사가 언제 무슨 까닭으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저 많은 유물들이 밭 속에서 발굴되었고 아직도 묻혀 있다 하니 혹 어느 땐가 큰 산사태를 당했거나, 아니면 불 먹은 기와조각이 흔전인 것으로 미루어 큰불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막연히 가늠해볼 뿐이다. 절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그리 또렷하지 않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지금은 전각 안에 남향으로 모셔진 불상이 발굴 당시에는 서쪽을 향하여 앉아 있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동·서로 서 있던 탑과의 관계가 애매해져 도무지 안개 속 같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국보 김천 갈항사지 · 삼층석탑 (金泉 葛項寺址 ·西 三層石塔) East and West Three-story Stone Pagodas from Galhangsa Temple Site, Gimcheon]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 ·서로 세워져 있던 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758)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남아있다.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담겨져 있는 탑이다.

출처: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 촬영


[국보 김천 갈항사지 · 삼층석탑]

전체적으로는 아담한 크기에 적절한 비례, 소박하고 건실한 미감이 돋보이는 석탑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석가탑 이후 가장 풍치 있고 아담한 탑”으로 꼽기도 하고, 아담하지만 균형 잡힌 몸매나 아름다운 조화로 미루어 신라 전성기 어느 명공의 회심의 역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기도 한다.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이 두 탑을 “단려(端麗)하고도 아순(雅淳), 가장 문아(文雅)한 탑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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