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가 머물던 절

2024. 1. 10. 05:24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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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 버스 정류장 옆 벽화, 회귀"


"청암사원"


"청암사 초입 계곡 폭포"


김천 불령산 청암사 일주문, 현판 글씨는 근세 명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가 썼다. 예서체 글씨로 힘있고 중후하다.


"천왕문"


[회당비각]

화엄학에 정통한 강백(講伯, 불교용어로 강사의 존칭)으로 이곳에서 입적한 회암 정혜(晦庵 定慧, 1685~1741)스님이 회당비각의 주인공이다. 귀록 조현명(歸鹿 趙顯命, 1690~1752)이 글을 지었다고 비문에 적혔는데, 이만한 벼슬아치(영조 때 우의정을 지냄)가 출가사문의 비문을 적는 일은 불교가 성하던 고려시대라면 몰라도 승려들이 멸시의 대상이던 조선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회암스님이 당시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동계 조구명(1693~1737)과 절친하였다는 비문 구절이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동계의 종형으로 그의 학식을 아꼈던 조현명도 종제를 징검다리로 회암스님과 친교가 두터워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비문까지 짓게 되었던 모양이다. 신분을 넘어서는 따뜻하고 도타운 우정으로 한 시대를 살았겠거니 짐작을 할 뿐 그 이상은 모를 일이다. 이 비를 지고 있는 거북은 등에 진 비가 무겁다는 표정은커녕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퉁방울눈, 주먹코에 윗니를 온통 드러내고 한없이 선한 웃음을 짓고 있다. 돌을 다루는 장인들의 솜씨가 자꾸 사그라들던 시대에 저런 웃음을 피워내는 여유와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비의 임자 회암스님이 저런 선한 웃음을 가진 멋쟁이였을까? 그것이 석공의 손끝을 타고 저리 빚어진 걸까? 아니면 기껏해야 ‘석수장이’라는 소리나 들으며 천대받던 석공의 천품이 저리 푸근하였던 걸까? 그것이 고된 일 속에서도 절로 우러나 저리 넉넉하고 푸진 웃음으로 맺힌 걸까?

[대운당비각]

청암사의 아쉽고 안타까운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청암사는 어지간히 불이 잦았다. 중간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청암사는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를 당해 전소되는 비운을 맞는다. 복구가 이루어진 청암사는 그러나 이로부터 130여 년 뒤인 정조 6년(1782) 다시 큰불이 나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도 바로 재건이 이루어진다. 그뒤 점차 퇴락해가던 청암사가 새로워지는 것은 20세기가 다 되어서이다. 광무 1년(1897) 청암사를 중수하기 위해 화주로 나선 대운(大雲, 1868~1936)스님이 8년에 걸쳐 청암사를 모두 보수한 뒤, 이어서 극락전을 새로 짓고 여기에 42수 관음상을 봉안하는 공덕을 쌓는다. 이렇게 보수를 끝낸 지 6년 만인 1911년 9월 또다시 원인 모를 불이 나 극락전과 백련암을 제외한 청암사를 모두 불태운다. 이에 대운스님은 다시 청암사를 일으켜 이듬해 봄에 복구를 마무리한다. 우리가 보는 청암사는 이때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비각의 임자가 바로 대운당 용각스님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청암사의 사적비]

근세의 학승으로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퇴경당이 비문을 지었는데, 비좌의 무늬가 재미있다. 앞면에는 가운데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연잎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 옆으로 나눠 섰으며, 또 동그란 잎을 셋 단 무슨 풀잎이 양쪽 가에 놓였다. 무늬를 남기고 주위를 파내는 수법이나 가장자리는 그저 선만을 따내어 마무리한 무심함 ― 조각이랄 것도 없이 그저 되는 대로 꽃과 잎을 새긴 어리숙한 솜씨가 수수한 박지분청 그릇이나 티없는 민화 한 점을 보는 듯하다. 좌우 옆면에도 같은 솜씨로 무언가를 물고 있는 새 한 마리, 꽃 가지를 새겼는데 초등학생의 그림같이 천진하다. 더 볼 만한 건 뒷면이다. 세 면에 무언가를 새기면서 여기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으니 이걸 게으르고 성의없다고 탓해야 할지 또는 끝맺음에 약한 우리네 천성으로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우비천]

김천 불령산 청암사 가는 길에 있는 우비천이란 샘물이 있다.

와우형의 청암사 코 위치로 소의 코가 늘 촉촉해야 하듯 우비천이 마르지 않으면 청암사와 증산면 일대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코샘, 돈샘이라고도 불리며 스님들이 지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고 전해진다. 부자가 된다는 속설을 지녀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떠간다.


 
 [바위 암각 최송설당]

바위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 가운데 최송설당은 청암사와 관련이 깊다. 대운스님이 청암사를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고 중창할 때의 대시주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녀는 김천 출신으로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으며,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와 고종의 비호 아래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이룬 인물이었다. 대운스님은 이런 송설당의 협력과 그녀를 연줄로 많은 궁녀들의 시주를 얻을 수 있었기에 짧은 기간에 큰 불사를 두 차례나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청암사]

청암사는 조선 인조 25년(1647)화재로 전소 되었는데 벽암 성총화상이 덕유산에서 이소식을 듣고 그 문도인 허정대사로 하여금 청암사를 재건토록하니 이에 허정대사가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건하였다. 이를 제2차 중창이라 한다.

이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정조 6년(1782)에 다시 재화를 입어 전각이 소실되자 환우 대사가 다시 신궁보전과 누당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제3차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고종 9년에는 주지 대운당 스님이 극락전을 창건하였다.

1911년 9월 21일 밤 청암사는 다시 화재를 입어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대운대사가 화주가 되어 대중을 위로하고 독려하여 그 다음해 다시 청암사를 재건 하였다. 특히 대사는 중국 강소성으로부터 석가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을 봉안하는 등 전각의 장엄을 완성하였다. 이를 청암사 제4차 중창이라고 한다.

출처:김천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청암사대웅전 (靑巖寺大雄殿)]

청암사는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이 세운 절이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나 191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3년에 걸쳐 다시 세웠는데 지금 있는 대웅전 역시 이 때 세운 것이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산신탱, 신중탱, 칠성탱, 독성탱 등 여러 점의 탱화와 소종(小鐘), 수번(繡幡)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대웅전 내부 불상]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보처를 거느리지 않은 이색적인 불상이 혼자서 불단에 앉아 있다. 육계 없이 계주만 붉게 칠한 머리, 솟는 듯이 퍼진 나발, 얇은 눈꺼풀, 붉은 빛을 군데군데 내비치는 법의 안자락, 그리고 어딘지 낯선 윤곽. 1912년 불사를 끝낸 대운스님은 대웅전에 중국 불상을 모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해 중국 강소성 항주로 건너가 불상을 만들어 와 모신 것이 이 불상이다. 말하자면 중국 불상이 되겠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청암사다층석탑 (靑巖寺多層石塔)]

청암사 대웅전 앞에 서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4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위층이 거의 비슷한 높이인데 보통 아래층 기단이 낮고 위층 기단이 높은 일반적인 탑들과는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면마다 불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큰 편으로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가 놓여 있다.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도선국사가 세운 탑이다. 기단에 비해 탑신이 가늘어 가냘픈 감을 주며, 탑신의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커서 불안정해 보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성주군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청암사 주지였던 대운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출처:문화재청


소가 왼쪽으로 누운 와우형의 청암사 전경


인현왕후가 폐서인 후 3년간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는 극락전이다. 조선 중기 궁궐 양식의 양반가 기왓집 형태로 일반사찰에선 잘 보이지 않는 건축물이다.


"자양전, 보광전, 극락전"


"보광전 앞 배례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청암사보광전 (靑巖寺普光殿)]

청암사는 통일신라 헌안왕 2년(858)에 도선이 세운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절이다.

보광전을 지은 것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정조 6년(1782)에 고쳐 세운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 앞서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가 장희빈 때문에 폐위되어 이곳 청암사 극락전에 은거하였는데, 이 때 극락전 서쪽에 인현황후의 복위를 빌기 위해 보광전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광무 9년(1905)에 다시 세웠으나 191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과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을 같이 보이고 있다. 안에는 42수의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고 벽면에 산신도(山神圖), 독성도(獨聖圖), 신상도(神像圖) 등이 걸려 있으며 상벽에는 불화를 그려 놓았다.

현존하는 전통 건축 가운데 드문 절충식 구성법을 보이고 있어 절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보광전 문이 잠긴 것 같아 문틈으로 보고 있었다. 스님이 문이 잠긴 게 아니라며 문을 열어주신다. 보광전 42수 관음보살상과 불화를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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