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안중근의사 유묵 - 국가안위노심초사

2024. 12. 24. 09:46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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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안중근의사 유묵 - 국가안위노심초사 (安重根義士 遺墨 - 國家安危勞心焦思) Calligraphy by An Jung-geun]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는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남긴 유묵(遺墨)이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여기에는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 8자를 중앙에 행서체로 쓰고, 왼쪽 위편에 “증안강검찰관(贈安岡檢察官)”, 오른쪽 아래편에 “경술삼월(庚戌三月)에 여순옥중(旅順獄中)에서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삼가 경의를 표하다(安重根謹拜)”라 쓰여 있으며, 그 밑에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먹물로 찍혀 있다. 

 

이것의 크기는 가로 38.2㎝, 세로 149㎝이다. 이 유묵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여순 옥중에서 자신을 취조한 당시 여순 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안강정사랑 (安岡靜四郞)> 검찰관에게 써준 것으로 야스오카는 죽기 직전 그의 장녀에게 물려주었으며, 그 후 1976년 2월 11일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국가유산청


안중근 義의
Ahn Junggeun's Righteousness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글씨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안중근 의사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줍니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 단지동맹 결성과 하얼빈 의거 결심까지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그의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글씨에는 교육가로서, 의병으로서, 장부로서, 지사로서 위태로운 시대를 극복하려 했던 굳건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國家安危
국가안위
勞心焦思
노심초사


I belabor my heart and brood anxiously over our nation's security


1910.3. | 보물
안중근의사숭모회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안중근 의사의 국가관과 애국심이 가장 잘 녹아있는 글씨이다. 국권 침탈당하는 시대 속에서 안중근의사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우며, 애국계몽운동, 의병전쟁, 의열투쟁, 사상투쟁 등 시대가 필요로하는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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