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완성_2020년 10월(Vol. 1)

2020. 10. 31. 07:20뚜벅뚜벅 여행의 완성/여행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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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완성_2020년 10월]

[프롤로그]

10월은 24절기 중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인 한로(寒露)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있는 달이다. 가을의 중턱에서 끝으로 향하는 시기이다. 찬 이슬이 내리고 날씨가 쾌청해 곡식과 과일이 잘 무르익는 절기다. 오곡백과 수확의 시기다.

24절기 중 열일곱 번째 절기인 한로(寒露)는 추분과 상강 사이의 절기다.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서 서리로 변하기 직전으로 잘 무르익은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시기이다. 또한 단풍이 짙어지고 여름새와 겨울새가 교체되는 절기이다.

24절기 중 열여덟 번째 절기인 상강(霜降)은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드는 절기다.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로, 농촌의 가을걷이가 한창인 수확의 계절이며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절기다.

찬 기운이 감도는 한로와 상강은 잘 여문 오곡백과가 풍성한 절기다. 가을의 정취를 흠뻑 즐기며 건강한 식재료를 맛볼 수 있는 시기다.

집 앞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며 황금색으로 익어가고 있다. 가을도 익어간다.

짚 앞 벼 베기가 끝난 논이다. 한 해 농사의 마무리자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여행]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

뚜벅뚜벅 아름다운 우리땅을 여행하며 삶의 체취와 역사의 흔적이 서린 문화유산을 만나다.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_10월,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소철,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살아 있는 화석이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뭇과에 하나뿐인 나무이다. 암수 딴 그루인 은행나무는 갈잎 큰키 나무다. 은행나무의 고향은 중국 저장 성에 위치한 천목산으로 알려져 있다. 은행(銀杏)이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 때 구양수와 매요신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따라서 은행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지금부터 1000년 전의 일이다.

은행은 ‘은빛 살구’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이 한자는 이 나무의 열매가 살구나무 열매를 닮아서 붙인 것이다. 은행은 송나라 때 지방 정부가 중앙 정부에 제공하는 조공품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나무 이름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압각수(鴨脚樹)’이다. 잎이 오리발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또 다른 이름 중 잘 알려진 것은 ‘공손수(公孫樹)’이다. 이 이름은 열매가 손자 대에 열린다는 뜻이다. 공손수처럼 열매를 강조한 또 다른 이름은 백과(白果)이다. 이는 열매의 껍질을 벗기면 흰색이 드러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식물도감에 등장하는 킹쿄는 린네가 은행의 일본어 발음 긴난(Ginnan)을 잘못 읽고 붙인 이름이다.

은행나무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유교와 불교 관련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유교와 불교의 수입 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경우에는 대략 송나라 때 들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의 은행나무는 18세기 유럽으로 건너갔다. 영국 큐 왕립식물원에는 1762년에 심은 은행나무가 아직 자라고 있다. 유럽에 건너간 은행나무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각지에는 수천 년 동안 살고 있는 은행나무가 많다. 특히 산둥 성 쥐셴 현 정림사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은행나무를 ‘비조(鼻祖)’라 부른다. 기원전 715년 노나라와 거나라 양국의 제후들이 이 나무 아래서 회의를 했다. 이 나무 주위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새긴 비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용문사 앞의 은행나무가 가장 나이가 많다. 1,100살이 넘는다.

출처:살아 있는 화석, 은행나무 (세상을 바꾼 나무, 2011. 6. 30., 강판권)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2016년 9월 6일 당진 면천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되며 총 23그루가 문화재청에 등록되어 보호되고 있다. 

지역별로는 서울 1그루, 인천. 경기도 2그루, 강원도 3그루, 충청도 6그루, 전라도 3그루, 경상도 8그루오 분포 되어 있다.(2020년 10월 현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23곳"


[서울 :1그루]

1.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서울 文廟 은행나무) 서울 종로구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 가지 발달이 왕성하고, 유주(乳柱)가 잘 발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


[인천.경기도 :2그루]

1. 제30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楊平 龍門寺 은행나무) 경기 양평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2. 제304호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江華 乶音島 은행나무) 인천 강화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강화 볼음도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이고, 높이는 24m, 가슴높이의 둘레는 8.96m이다. 마을의 언덕 위에서 정자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신성스런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800년 전에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며, 이 나무의 가지를 태우면 신이 화가나서 재앙을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누구도 가지를 다치지 않게 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 그믐날에 모여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풍어제를 지내곤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강화 볼음도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


[강원도 :3그루]

1. 제76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寧越 下松里 은행나무) 강원 영월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1,000∼1,2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29m, 둘레 14.8m이다. 처음에는 대정사(對井寺)라는 절 앞에 서 있었으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지금의 줄기는 새싹이 돋아 자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마을의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나무 속에 신통한 뱀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곤충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정성을 들여 빌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종교적·문화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2. 제166호 강릉 장덕리 은행나무(江陵 長德里 은행나무) 강원 강릉시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주문진 장덕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6m, 둘레는 9.63m이다. 지상 1.8m와 2.5m 높이 사이에서 8개의 큰 가지로 갈라져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는데,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는 이 나무에 많은 은행이 열렸는데, 열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자 이곳을 지나던 늙은 스님이 이 냄새를 싫어해 부적을 써서 붙였더니 그 후부터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은행나무의 대부분은 암나무가 오래 사는데 주문진 장덕리의 은행나무는 수나무로서 오래 살고 있어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으며, 전설 등의 문화성도 가지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강릉 장덕리 은행나무


3. 제167호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原州 磻溪里 은행나무) 강원 원주시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반계리 은행나무의 나이는 800∼1,0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둘레 16.27m로 논밭 중앙에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전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일부 가지는 부러질 염려가 있어서 받침대로 받쳐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살던 성주 이씨의 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관리하다가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큰스님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물을 마시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이 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으며, 가을에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신목으로서 역할을 하고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민속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충청도 : 6그루]

1. 제84호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錦山 要光里 은행나무) 충남 금산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m, 가슴높이 둘레 12.93m이다. 줄기가 썩어서 동굴처럼 비어 있고 사방으로 자란 가지 중에 남쪽 및 동쪽의 가지는 부러졌는데 그 가지로 3년 동안 밥상을 만들고 관 37개를 만들어 마을 주민이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500년 전 이 마을에서 살던 오씨(吳氏)의 조상이 전라감사(현 전라도지사)로 있을 때 나무 밑에 정자를 짓고, 은행나무 정자라는 뜻의 행정(杏亭)이라고 불렀는데 한때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란 이름이 이렇게 불리워지기도 했다. 현재는 행정헌(杏亭軒)이라는 육각정자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머리가 둔한 아이를 밤중에 이 나무 밑에 한 시간쯤 세워두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며, 잎을 삶아서 먹으면 노인의 해소병이 없어지고, 나무에 정성 들여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외에도 나라와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를 내어 알려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와 같은 전설을 믿는 사람들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 자정에 나무 밑에 모여 새해의 행운을 빌었다고 한다.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와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인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


2. 제165호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槐山 邑內里 은행나무) 충북 괴산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읍내리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 1000살 정도이고 높이 16.4m, 가슴높이 둘레 7.35m이다. 현재 청안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다. 줄기 곳곳에 가지가 잘려나간 흔적이 있고 끝가지의 일부는 죽었으나 비교적 사방으로 고르게 퍼져 자랐다.

이 나무는 고려 성종(재위 981∼997) 때 이곳의 성주(지금의 군수)가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성(城)내에 연못이 있었으면 좋겠다하여 백성들이 ‘청당(淸塘)’이라는 못을 팠다. 그 주변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주가 죽은 후 좋은 정치를 베푼 성주의 뜻을 기려 나무를 정성껏 가꾸어 온 것이다. 이 나무 속에는 귀달린 뱀이 살면서 나무를 해치려는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고 하는 전설이 함께 내려오고 있어 지금까지 잘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읍내리 은행나무는 마을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또는 백성을 사랑하는 고을 성주를 기리고 후손들의 교훈이 되도록 하는 상징성을 가진 나무로서 문화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1,000년 가까이 살아온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


3. 제223호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永同 寧國寺 은행나무) 충북 영동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약 31m, 가슴높이 둘레 약 11m 정도이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졌으며,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큰 나무로 문화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4. 제320호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扶餘 珠岩里 은행나무) 충남 부여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부여 주암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8.62m로 주암리 마을 뒤쪽에 있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당시 좌평 맹씨(孟氏)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나무는 백제가 망할 때와 신라가 망할 때, 그리고 고려가 망할 때의 3회의 난리 때마다 칡넝쿨이 감아 올라가는 재난을 겪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한 고려시대 숭각사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기 위하여 이 은행나무의 큰 가지 하나를 베어 가다가 급사하였으며 사찰도 폐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신령한 나무로 보호되어 왔으며, 전염병이 돌 때 이 마을만 화를 면했다하여 영험한 나무라고 믿었다.

부여 주암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 살아왔으며,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5. 제365호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錦山 寶石寺 은행나무) 충남 금산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34m, 가슴높이의 둘레 10.72m의 크기로 뿌리부분에 2∼3m 높이의 새로 난 싹이 수없이 돋아나 신기하게 보인다. 이 나무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6. 제551호 당진 면천 은행나무(唐津 沔川 은행나무) 충남 당진시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옛 면천초등학교 부지 안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는 암수이며 한 그루는 나무높이가 20m, 가슴높이 둘레는 6.1m에 이르고 또 한 그루는 나무높이가 19m, 가슴높이 둘레는 6.2m에 이른다.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할 때 공을 세운 복지겸 장군과 그의 딸 영랑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복지겸이 노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와 원인 모를 병을 얻어 눕게 되었고 그의 어린 딸 영랑이 날마다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신령님께 빌었다. 그러다 이상한 힘에 끌려 잠에 취했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은행나무 두 그루를 구해다가 뜰에 심고, 앞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잎을 따와서 안샘물로 술을 담가 그 술을 백일동안 익혀서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복지겸 장군의 병이 거짓말처럼 치유됐다는 설화가 있으며, 해마다 마을 주민이 은행나무에 모여 목신제(木神祭)를 올리는 등 역사적, 문화적, 민속적 가치가 있다.

당진 면천 은행나무


[전라도 :3그루]

1. 제303호 화순 야사리 은행나무(和順 野沙里 은행나무) 전남 화순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화순 야사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7m, 가슴높이의 둘레가 9.12m로 야사리 마을의 집뜰 한 구석에 있다. 줄기 중심은 동굴처럼 뚫어졌으나 나무에서 싹이 나와 자라고 있다. 가지 사이에는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유주가 아래를 향해 달려있다.

조선 성종(재위 1469∼1494) 때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심은 것이라고 하며, 신통력이 있어 국운이 융성하면 나라의 화평을 알리고, 때로는 우는 소리를 내어 전란과 나라의 불운을 알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새해의 풍년과 행운을 기원했다고 한다.

화순 야사리 은행나무는 마을이 형성된 시기를 알려주고 있는 나무이며,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화순 야사리 은행나무


2. 제385호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康津 城東里 은행나무) 전남 강진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가슴높이의 둘레 7.2m로 마을 중앙에 있다. 뿌리가 민가의 부엌, 방 밑에까지 뻗어 있으며 뿌리 부근에는 주민들이 휴식처로 이용하고 있는 큰 바위가 놓여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병영면은 네덜란드 하멜(Hamel) 일행이 약 7년간(1656.3∼1663.2)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이들은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를 보았다고 『하멜표류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은행나무가 아닌가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이곳에 내려온 관리가 폭풍으로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로 베개를 만들어 자다가 병이 들었다. 그러던 중 한 노인이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베개를 나무에 붙여주면 병이 나으리라”고 한 말을 따라 그대로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후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5일 자정 무렵에 은행나무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역사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한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


3. 제482호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潭陽 鳳安里 은행나무) 전남 담양군

술지마을 중앙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마을 외곽 네 방위에 있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을 지키는 나무로 흔치 않게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에서도 가슴높이 둘레가 8m로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른 은행나무에 비하여 손색이 없이 크고 웅장함.

나라의 중대사에 이 나무가 울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생활이 어려운 시기에도 도둑이 없는 등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나무로 기려오면서, 휴식공간은 물론 수확한 열매는 마을 공동사업에 사용하는 등 학술적 대표성과 함께 향토 문화적 가치도 큼.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


[경상도 :8그루]

1. 제64호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蔚州 九良里 은행나무) 울산 울주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구량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둘레 8.37m, 높이 22.5m이다. 현재 구량리 중리마을 논밭 가운데 서 있으며,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수관의 1/3 정도가 훼손되었다. 

약 500년 전에 이판윤(李判尹)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내려올 때 서울에서 가지고 온 나무를 자기집 연못가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지며, 나무 밑의 썩은 구멍에 아들을 못 낳는 부인들이 정성을 들여 빌면 아들을 나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구량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이며, 민속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


2. 제175호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安東 龍溪里 은행나무) 경북 안동시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계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7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1.0m, 둘레 13.67m이다. 원래는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의 건설로 물에 잠길 위치에 있어, 15m의 높이로 흙을 쌓아 지금의 위치에 옮겨 심은 것이다. 

이 나무에는 조선 선조(재위 1576∼1608)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서울에서 내려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은행나무 계(契)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매년 7월에 나무 밑에 모여 서로의 친목을 도모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이 마을은 사라졌지만, 탁씨의 자손들은 해마다 나무에 제사를 드리며 보호하고 있다.

용계의 은행나무는 주민 단합을 이루게 하는 상징물로서의 역할을 하여 온 나무로서 가치가 크고, 우리 선조들이 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한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우리나라에 있는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 중에 하나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3. 제225호 구미 농소리 은행나무(龜尾 農所里 은행나무) 경북 구미시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구미 농소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1.6m, 둘레는 11.85m이다. 싹 중에 일부는 계속 자라 나무줄기 높이와 비슷한 키가 되었는데, 이러한 싹이 많아 모습이 마치 숲과 같다.

나무의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뒷산에 있는 골짜기를 ‘골 바윗골 절터 양지’라고 부르고 있으며 돌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한때 절이나 장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 은행나무는 절과 관계가 있는 나무로 여겨진다. 마을사람들은 이 은행나무가 마을을 보호해 준다고 여겨, 매년 10월 1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나뭇가지에 새들도 앉지 못할 정도로 위엄시 되었으나 지금은 나무 꼭대기에 둥지가 있다.

구미 농소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연구자료가 될 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구미 농소리 은행나무


4.제300호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金陵 釣龍里 은행나무) 경북 김천시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서원이나 향교의 뜰에 많이 심었고,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비교적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는 특성이 있어서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이 나무는 마을의 뒤편에 자리한 섬계서원의 뒤뜰 담장의 왼쪽 구석에 있다. 담장 구석에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수관의 대부분이 담장 밖으로 뻗어 있으며, 뿌리도 담장 밖 지면에 많이 노출되어 있으나 보호울타리도 없다.

현재 은행나무 뿌리 근처와 줄기 밑동에서 맹아성 가지들이 무수히 발생해 있는 상태이고, 위쪽의 가지 여기저기에 유주가 길게 발달해 있다.

섬계서원(剡溪書院)은 세종 때의 문신으로 단종복위에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관여하였다가 죽은 김문기(金文起)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섬계(剡溪)는 본래 이 마을의 이름이 옛날에 섬계리(剡溪里)였으므로 붙인 이름이지만, 지금은 조룡리(釣龍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1456년 그가 죽은 후 은행나무를 심은 것으로 계산해서 현재 나이를 약 44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금릉 조룡리 은행나무


5.제301호 청도 대전리 은행나무(淸道 大田里 은행나무) 경북 청도군

마을 한 가운데에서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는 청도 대전리의 은행나무는 높이가 30.4m, 둘레는 8.8m에 이르는 수나무이다. 이 나무는 나이가 400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전설에 의하면 1,300년 전 지금의 은행나무가 있던 자리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도사가 물을 먹으려다 빠져 죽은 후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려다 빠져 죽었는데,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은행에서 싹이 터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신라 말경에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 경계나무로 심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의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다음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데 낙엽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청도 대전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청도 대전리 은행나무


6. 제302호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宜寧 世干里 은행나무) 경남 의령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의령 세간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 가운데에 있으며, 마을 옆에서 자라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의령 세간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


7. 제402호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靑道 磧川寺 은행나무) 경북 청도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5.5m, 둘레 8.7m의 크기로 3m 위치까지 한 줄기이며 그 위부터는 3개의 가지로 나뉘어졌다. 맹아 및 유주가 유난히 발달했는데, 맹아는 새로 난 싹을 말하며, 유주는 가지 사이에 혹 또는 짧고 뭉뚝한 방망이처럼 생긴 가지를 말한다. 유주는 일종의 뿌리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5년(1175)에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


8. 제406호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咸陽 雲谷里 은행나무) 경남 함양군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마을 입구에서 자라고 있는 함양 운곡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8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38m, 둘레 8.75m의 크기로 땅에서 1m 지점에서 줄기가 2개로 분리되었다가 3m지점에서 다시 합쳐져 5m부분에서 5개로 갈라진다. 

운곡리 마을이 생기면서 심은 나무로 마을의 이름도 이 나무로 인해 은행정 또는 은행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나무 앞을 지나면서 예를 갖추지 않으면 그 집안과 마을에 재앙이 찾아든다고 전하기도 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로 이 나무가 마을의 돛대 역할을 하여 마을을 지켜준다고 여겨 소중히 보호되고 있다.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는 마을의 상징물로서 역사성 및 향토성, 문화성이 클 뿐만 아니라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


[대한민국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이란(World Heritage)?]

「세계유산협약」(1972)에 의거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 유산으로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됨. 

출처:문화재청


[세계유산현황]

2019년 7월 현재 세계유산은 전 세계 167개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총 1,121점(2019년 등재기준) 가운데 문화유산이 869점, 자연유산 213점, 복합유산이 39점이다. 한편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에는 총 53점(2019년 등재기준)이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 · 불국사(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년)’, ‘한국의 서원(2019년)’으로 총 14점이 있다

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뚜벅뚜벅 대한민국 세계문화유산_종묘(1995년)]

[요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묘(宗廟)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왕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문무백관(文武百官)과 함께 정기적으로 제사에 참여한 공간으로 왕실의 상징성과 정통성을 보여 준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왕실 제례 건축으로서 공간계획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그 보존 상태가 우수하다. 14세기 말에 창건되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세기 초에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중심 건물인 종묘 정전(宗廟 正殿)은 정면이 매우 길고 건물 앞마당과 일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의 오랜 정신적 전통인 조상숭배 사상과 제사 의례를 바탕으로 왕실 주도 하에 엄격한 형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현재에도 조선 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종묘제례(宗廟祭禮)라 불리는 제사 의례가 행해지고 있으며 제사에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음악과 춤이 동반된다. 종묘의 건축과 관리, 제례 봉행에 관한 모든 사항은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으로 상세히 남아있다.

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영문명]

Jongmyo Shrine


[완전성]

종묘는 제향 공간과 건축물, 제향을 지원하는 부속 공간과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건물과 시설물은 조선 시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심과 분리되어 있다. 종묘와 그 주변 경관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보호되고 있으며, 종묘제례 및 제례악 또한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 종묘제례는 매년 정기적으로 봉행된다.


[진정성]

종묘는 유형적 원형과 무형적 행례 절차에 있어 세계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종묘의 공간 배치와 건축은 조선 시대 축조 당시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제의와 음악, 춤 또한 잘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17세기에 중건된 건물은 선왕의 신위 수가 늘어남에 따라 두 차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조건물의 특성상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왔지만 보수공사 또한 관련 문헌과 연구를 바탕으로 전통 법식에 맞는 재료와 기술을 이용해 공인된 장인들이 진행한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서 체계적으로 전승, 보호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종묘는 조선왕조의 선왕들을 모시는 유교 사당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8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같은 해 12월 중추원부사 최이에게 종묘를 짓도록 명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에 완성된 종묘는 처음에 ‘태묘(太廟)’라고 했으며, 태조의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종묘로 옮겨 보관했다.

세종 원년(1419년)에는 조선 2대 왕 정종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태묘의 서쪽에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공간이 부족해지자 1547년에는 네 개의 묘실을 증축했다. 1592년 5월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종묘의 신주들을 가지고 피신했지만, 종묘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다. 그후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1667년에 영녕전을 증축했고 1778년과 1836년에는 정전을 증축하여, 영녕전과 정전의 묘실 수는 각각 8실과 19실로 늘어났다. 이후에도 증축이 이루어져, 현재는 영녕전은 16실, 정전에는 19실이 있다. 또한 정전에서 매년 거행되는 제사인 종묘제례는 굉장히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중요한 무형문화재이다. 음악, 노래, 춤을 아우르는 종묘제례는 14세기 말 태조 때 중국에서 들어온 궁중음악을 기원으로 한다.


[보존 및 관리 체계]

종묘의 전 영역과 정전, 영녕전 등 주요 건물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14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형태가 온전히 전해져 온 종묘제례 및 제례악 또한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이다.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의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종로구 조례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해당 구역 내의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종묘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종묘의 건물 및 시설물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25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종묘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있으며 3, 4년 주기로 전문가들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도시교통과, 문화재과가 협력하여 종묘 주변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기적으로 기본 경관 계획,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안 및 사업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종묘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종묘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진행한다. 목조건축물의 가장 큰 위협요소는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궁 및 종묘 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본문]

종묘는 선왕을 기리는 유교 사당의 뛰어난 예이다. 16세기 이후 상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조선왕조(1392~1910)의 선왕들을 모시는 사당인 종묘에서는 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가 거행되어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에 수도를 한양(漢陽, 현재의 서울)으로 옮기면서 종묘를 건축하도록 명했고, 태조의 4대조 신주를 개성에서 종묘로 옮겼다. 이후 후대 왕들의 신주를 모실 건물을 증축했고, 정전(正殿)에 있던 신주(神主) 일부를 새로 지은 영녕전(永寧殿, 16실)으로 옮겼다. 종묘에는 모두 35실이 있다.

종묘는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계곡에 위치하며, 전통 풍수지리에 따라 자연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종묘는 각각 향대청(香大廳), 정전(주전), 영녕전(별묘)을 중심으로 하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 주요 구성 요소로는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외대문(정문), 제례가 거행되기 전에 왕이 대기하던 기와지붕 목조건물인 망묘루, 태조가 고려 공민왕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지었던 공민왕신당, 제례에 사용하던 물품들을 보관하던 향대청, 참가자들이 의식이 거행되기를 기다리던 재실(齋室, 주 건물과 양옆의 부속 건물로 구성됨) 등이 있다.

정전은 남문, 동문, 서문이 달린 직사각형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닥에는 거친 화강암으로 만든 묘정 월대(廟庭月臺)가 넓게 깔려 있다. 세 개의 계단이 돌 기단에서 정전을 향해 나 있으며, 보다 작은 계단들이 양옆 끝에 있다. 정전은 목조건축물이며, 그 좌우에는 월대 쪽으로 나온 동월랑(東月廊)·서월랑(西月廊)이 딸려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정전은 개방된 정면에 긴 복도가 있고, 나무문이 달려 있는 내부에 19실이 있다. 이 묘실들은 다시 여러 개의 칸으로 구분되어 신주 49개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칸막이가 쳐진 협실이 딸려 있다. 정전의 박공지붕은 소박한 목재 까치발이 받치고 있다. 영령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정문으로는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다. 왕은 동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악사들은 더 작은 서문으로 다녔다.

칠사당은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竈), 중류(中霤), 국문(國門), 공려(公厲), 국행(國行) 등의 칠사(七祀)와 함께 역병으로 사망한 이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공신당(功臣堂)은 역대 공신 83명의 신주를 모신 곳이며, 전사청(典祀廳)은 제례에 사용된 물품과 예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정전 수복방(守僕房)은 관원들의 거처로, 제례에 쓰일 제물을 검사하는 곳이기도 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 있던 왕들의 신주를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옮겨서 보관했는데, 정전에 계속 모실 수 없는 왕들의 신주를 옮겨 모셨다. 영녕전은 문이 세 개가 달린 직사각형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당에는 얇은 화강암이 깔려 있다. 영녕전의 주 건물 양옆에는 크기가 다른 곁방이 딸려 있다. 둥근 기둥의 꼭대기에는 목재 까치발이 달려서 박공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다.

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관련이미지]

종묘(Jongmyo Shrine,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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