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 길상사

2021. 7. 30. 05:09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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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기념물 진천 길상사 (鎭川 吉祥祠)]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595∼673)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고, 무열왕 7년(660)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676)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고종 1년(1864)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는데 1926년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고, 1975년 정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장우성이 그린 그의 초상화와 흥무전, 흥무대왕신성비 등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길상사 은행나무와 홍살문"


​진천 길상사(김유신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는 길상사는 탄생지에서 뚝 떨어진 진천읍 벽암리 도당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는 탄생지 뒤쪽 태령산 아래에 있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 나라에서 제를 지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8년(1408)부터는 격을 낮추어 진천현의 주관으로 제사지내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태령산 아래 길상사가 폐허로 변하자 철종 2년(1851)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를 세워 김유신의 위패를 모셨지만 고종 원년에 철폐되었다. 그후 옛 길상사 자리에 중건한 계양묘나 진천읍 벽암리에 세운 서발한 사당에서 향화를 이어왔다. 1922년 대홍수로 서발한 사당이 무너지자 1927년에 지금의 자리에 본래 이름인 길상사로 재건된 것이다.

지금의 길상사도 한국전쟁 때 상하여 중수한 적이 있다.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으로 중건했으며 장우성이 그린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마련해 본전인 흥무전에 봉안하였다. 지금 길상사 뜰에는 1957년 이선근이 비문을 짓고 김만희가 글씨를 쓴 흥무대왕 신성비와 1976년 이은상이 비문을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써서 세운 김유신 장군 사적비가 있으며, 입구에는 1976년에 세운 길상사 중건사적비가 서 있다. 길상사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이고 진천군과 김해 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진천땅은 삼국시대 세 나라가 각축하던 곳이므로 곳곳에 크고 작은 산성이 있다. 길상사가 있는 도당산 위에도 신라시대 석축산성인 도당산성이 있다. 둘레 823.5m이며 안에 샘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흥무전을 개축할 때 없어졌고 나머지 하나는 모양이 변했지만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현재 길상사 삼문 수구 쪽에 도당산성의 문터가 있었고, 길상사를 중건할 때 입구 왼쪽에서 높이 2.4m 폭 1.9m의 석축 흔적이 드러났었으나 공사로 묻혀버렸다. 성안에서는 망대 자리가 발견되었고 신라계 경질 토기조각이 조금 발견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토기와 기와조각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길상사 중건 사적비, 김만희 공적비"


"외삼문"


"내삼문"


"흥무전, 장우성이 그린 김유신 장군 영정, 흥무전 현판"


 "협문, 흥무왕신성비, 내삼문, 김유신장군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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