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자연석 돌다리, 진천 농다리

2021. 7. 29. 05:57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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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농다리]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중리)마을은 상산 임씨의 세거지로, 고려 적에 최씨 무신정권의 뒤를 이어 권세를 잡았던 무신 임연(林衍, ?~1270)이 태어난 곳이다.)


[구산동 수호성]

이곳 성은 구산동을 수호하고자 1992년 10월부터 3개월간 주민들이 모두합심하여 흙과 돌로 쌓은것이다. 중부고속도로가 1985년 4월 착공하여 1987년 12월 경기도 하남에서 경부고속도로 남이 분기점까지 준공되어 개통되었다.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된 후에 이 마을에는 예측하지 못한 재난이 닥쳐오기 시작하였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구산동 마을의 청.장년들이 질병과 사고로 3년 사이에 13명이나 유명계로 가는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된다. 부락 노인들이 액운을 막기위하여 강원도에서 유명한 만허스님을 모시어 지난 사실을 알리니 스님께서 이곳의 지형을 보시고 이 마을 구산동의 지형이 행주형인데 마을 앞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막고 있고 풍수설로 보아 풍랑을 만난 배가 고속도로로 인하여 전복되어 나아갈 수 없으므로 마을 젊은이들의 불행이 연속되니 배가 닻을 내려 안전하게 정박하자는 뜻으로 마을 터를 지켜줄 석성을 쌓아야 한다. 이래서 생긴 수호성이다.


[소습천의 유래]

소습천은 지방문화재 제28호인 농다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비탈의 반석은 品자형을 이루고 있고 반석 사이에서 용출되는 샘물은 연중 마르지 않는다. 이 샘물은 풍습에 좋고 안질에도 양약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또한 이 샘은 어수천(御水泉)이라고도 하는데 세종대왕께서 안질 치료차 초정에 가시는 도중 이곳을 지나가실 때 이 샘물을 마시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말이 널리 알려지자 인근 지역 아낙네들은 치마로 병풍을 만들어 치고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자연석 돌다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진천 농다리 (鎭川 籠橋)]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여 있는 다리로, 독특한 모습이 눈에 띈다.

다리는 작은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린 후, 지네모양을 본떠 길게 늘여 만들어 졌으며, 총 28칸의 마디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을 쌓아올릴 때에는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다 하는데, 폭이 1m도 채 되지 않는 다리임에도 장마 등에 의해 떠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있어, 그 튼튼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옛날에는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만큼 높았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바닥이 많이 높아져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진천 농교는 『상산지』와『조선환여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초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천여년 세월을 버텨온 돌다리이며, 과학적 공법의 우수함을 짐작하게 할 만큼 특이한 양식으로 짜여진 이 다리는 전국적으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진천 농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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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농다리]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중리)마을은 상산 임씨의 세거지로, 고려 적에 최씨 무신정권의 뒤를 이어 권세를 잡았던 무신 임연(林衍, ?~1270)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세금천(洗錦川)이다. 여기에서 매우 독특한 형태의 다리 하나를 만난다.

다리는 얼핏 보아 거대한 지네가 몸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자연석을 축대 쌓듯이 안으로 물려가며 쌓아올린 교각의 너비가 그 위에 올려진 상판보다 넓으므로, 튀어나온 교각의 양끝이 지네 발처럼 보이는 것이다. 재료로 쓰인 돌도 독특한데 주로 자색이지만 얼룩무늬가 박힌 쑥색 돌도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 동네 돌이 대개 그렇다.

두께가 각각 1m가 넘는 교각들은 양끝을 유선형으로 오므려 물살의 저항을 덜 받게 해놓았으며 너비가 3m쯤 된다. 그 위 한가운데에 길이 1.7m 안팎, 두께 0.2m쯤 되는 돌판을 한 개 또는 두 개씩 걸쳐서 상판으로 삼았다. 옛 기록에 따르면 맨 처음에는 교각의 수가 28개였다는데 지금은 양쪽으로 두 개씩이 줄어서 24개만 남아 있다. 다리 전체의 길이는 현재 93.6m에 이른다.

예전에는 어른이 서서 다리 아래로 지나갈 만큼 물 바닥이 낮았다지만 지금은 토사가 많이 쌓여서 그 아래에 묻힌 교각의 전체 높이나 기반부는 확인할 수 없다. 상판석 양쪽으로 교각이 튀어나오게 한 것이라든가 교각의 양끝을 유선형으로 만드는 등의 배려로 인해 이 다리는 오랜 세월 이 만큼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오랜 세월이다보니 조금씩 허물어진 것을 다시 손보는 가운데 변형이 있었는지 교각과 상판의 길이나 간격 등이 일정하지 않고 다리의 방향도 중간에 조금 휘어 있다. ‘농(籠)다리’라는 이름은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고려 고종 때의 권신인 임연이 전성기에 고향 마을 앞에 놓은 것이라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이 다리는 대략 고려 말에 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 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임연은 날마다 세금천에서 세수를 했다고 한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임연이 세수를 하다보니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이라는 것. 그 정경을 딱하게 여긴 임연은 당장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때 일을 마친 용마는 기운이 다 빠져서 죽었는데 용마에 실었던 마지막 돌이 떨어져 그대로 둔 것이 마을의 용바위라고 한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면 농다리가 며칠씩 우는데 한일합방 때와 한국전쟁 때도 며칠이고 울어서 동네사람들이 잠을 못 잤다고들 한다. 다리가 오래되다보니 전설도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은 후 그 기념으로 농다리를 놓았다는 전설도 있다.

한편, 진천 일대의 좋은 경치 여덟 가지를 꼽은 ‘상산팔경’ 가운데 ‘농암모설’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 농다리 위에 흰눈이 쌓였을 때의 정취를 말하는 것이다. 농다리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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