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보개산 각연사

2021. 8. 2. 06:45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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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보개산 각연사]

​괴산 태성차부슈퍼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하차한다. 절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없다. 태성삼거리 우측 길로 4.6km 정도 도보 이동한다. 속리산 계곡물 소리 들으며 걷다 보면 보개산 각연사 현판이 쓰인 일주문이 나온다.

파란 고춧잎과 고추 사이로 빨갛게 익은 고추가 돋보인다. 명성 높은 괴산 고추다. 옥수수 심었던 자리엔 파란 배추가 심어져 있다. 누런 옥수숫대가 밭골 사이에 누워 있다.


"보개산 각연사 일주문"


각연사(속리산국립공원 자락에 드는 보개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 태성리에서 산자락을 향해 들어가는데 마을이 끝나고 논밭도 끝난 후 본격적으로 계곡을 끼고 들어가기를 한참, 앞길에 다람쥐와 청설모, 작은 산새들이 이리저리 풍기고 바람이 맑다. 꽤 깊숙이 들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쯤 계천 건너 왼쪽에 정남향한 절이 나타난다. 오래된 절 있을 만한 아늑한 자리이다.

출처: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각연사(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2년(515)에 유일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각연사 앞산인 칠보산 너머 칠성면 쌍곡리 사동(절골)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자고 일어나보면 목재 다듬을 때 나온 대패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유일 스님이 밤잠을 안 자고 지켜보니 까치(또는 까마귀)들이 몰려와 대패밥을 하나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스님이 따라가보니 까치들은 산 너머 못에 대패밥을 떨어뜨려 못을 메우고 있었다. 그 못에서 이상한 광채가 솟아나 들여다보니 석불이 한 기 들어 있었다. 유일 스님은 쌍곡에 짓던 절을 못 있는 데로 옮겨 짓고 못에서 나온 석불을 모신 후 ‘깨달음이 연못 속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覺有佛於淵)라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로 지었으며, 지금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못에 있던 그 석불이라고 한다.

​그후 고려 초기 통일대사가 중창하여 대찰이 되었고 고려 혜종 때 불전들을 중수했으며 조선시대에도 1648년과 1655년의 중수를 거쳐 1899년 비로자나불 개금 불사를 했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서도 여러 차례 중수를 했다. 그러나 절의 내력을 상세히 전해줄 기록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지만 지금 각연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불전으로 대웅전과 비로전이 있고 요사채 두 동과 삼성각, 산신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웅전 앞 층계를 오르노라면 옛 건물의 기단 등으로 쓰였을 길다란 석재들이 계단돌로 끼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절에서 이런저런 공사를 하는 중에 발견된 맷돌이나 기름틀, 석등 또는 부도의 지붕돌 등도 입구의 새로 쌓은 축대 가에 쌓여 있고, 주춧돌 같은 것은 이곳저곳에서 무수히 나온다고 한다.

출처: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괴산 각연사 대웅전]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유일이 세운 절로 지었을 당시의 설화에 의하면 현재의 칠성면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나타나서 대패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물고 날아가 작은 연못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유일이 물 속을 들여다보니 불상 하나가 있었음으로 깨달음을 얻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어서 각연사라 하였다 한다.

​고려 전기에 통일이 다시 지었으며, 혜종(재위 943∼945) 때 수리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연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절의 중앙에 위치한다. 네모난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정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빗살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고, 옆면 앞쪽에도 빗살문을 달았다. 내부에는 원형이 잘 남아있는 장엄한 닫집이 있고,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각연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어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살필 수 있는 건물이다.

 출처: 문화재청

대웅전 불상(석가여래좌상과 설법의 부처 아미타여래좌상, 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준다는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감로수(더위에 걸어 땀도 흐르고 갈증도 난다. 물 한 잔 마신다. 글씨처럼 달콤하고 맛있는 이슬이다.)


아귀밥통.청수통(사찰 답사를 하다 보면 사찰의 전각 혹은 요사채 건물 주변에 기와조각으로 원형 혹은 삼각형으로 그릇모양을 만들고 그 속에 돌 또는 기와조각들을 넣어둔 것을 볼 수 있다. 청수통(淸水筒) 또는 아귀밥통이라 부른다.

​아귀들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먹거리는 청수물뿐인데 청수물에 밥 한 톨이나 고춧가루 하나라도 있으면 불이 되어 아귀들의 목구멍을 태운다고 한다.)


보호수 보리자나무(수령 350년, 높이 18m의 괴산군 보호수이다. 보리자 나무는 부처가 득도한 인도의 보리수와는 학명부터 전혀 다른 나무다. 인도와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며 인도의 보리수 나무 대안으로 중국의 보리자 나무를 사찰에 심었다. 한반도 전역의 사찰에 퍼지면서 보리자 나무는 스님들과 불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보리수 나무”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령 350년 굵고 높은 보리자나무 앞에 어린 보리자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주변 땅에는 보리자라고 불리는 둥근 열매까 떨어져 있다. 열매로는 염주를 만든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괴산 각연사 비로전]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으로 이곳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을 모시고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주춧돌은 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기둥은 가운데만 약간 굵게 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각연사 비로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단아하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보이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보물 제433호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의 상투 모양 머리(육계)는 펑퍼짐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옷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다리부분의 옷주름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었다. 이런 표현은 얼굴모습과 함께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4호)과 직결되는 것이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은 매우 어색한데, 이것은 왼쪽에만 걸쳐 입은 옷과 함께 불상의 오른쪽을 더욱 허술하게 만들고 있다.

불상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듯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물방울 모양이다. 광배를 살펴보면 불상의 머리 위쪽과 불상 양쪽으로 각각 3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졌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신라 전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화려해진 모습을 보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각연사를 창건한 유일 스님이 못 안에서 건져 모셨다고 전해지는 석불이다. 그러나 각 부분의 조각수법과 양식으로 보아 신라 하대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광배와 몸 전체를 호분으로 하얗게 바르고 머리와 눈썹, 눈, 입, 수염 등을 그려넣어 원형이 가려져 있다.

​본디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3.02m이다. 머리 위의 육계가 낮고 널찍하여 두드러지지 않으며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코가 낮다. 작은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었고 얼굴에 비해 귓불이 두텁고 길며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얼굴형과 더불어 체구가 단아한데 어깨와 팔뚝,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아쥐어 지권인을 맺은 손등이 꼭꼭 쥐어보고 싶을 만큼 아담한 부피로 부드럽고 곱게 표현되었다. 오른쪽 어깨는 드러나 있으며 왼쪽 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얇은 법의가 유려하게 주름지으며 왼팔에 걸쳐지고 비스듬히 몸 앞으로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무릎을 덮었다.

한 장의 큰 돌로 이루어진 광배는 위쪽이 뾰족한 보주형이며 매우 화려하다. 그 안에 각각 두 줄의 양각선을 새겨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고 선 안쪽에는 풍성한 구름무늬를, 바깥에는 화려한 불꽃무늬를 놓았다. 두광 중심 부분에는 단엽 8판 연꽃 모양이 장식되었다. 두신광을 표현한 선 위에 화불을 새겼는데 불상의 머리 윗부분에 나란히 앉은 세 분, 머리 양옆에 한 분씩, 그리고 어깨와 팔꿈치 양옆으로 한 분씩 해서 모두 아홉 구이다. 화불은 모두 둥근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고 구름 위에 뜬 연화좌에 앉아 합장한 모습이다.

이 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는 뒷면에도 화려한 가마[輦]가 새겨져서 눈길을 끈다. 가마는 꼭대기에 불꽃 모양 보주가 있고 네 귀퉁이에 귀꽃과 영락이 장식되었으며 보주로부터 내려진 장막이 겹겹이 위를 덮은 모습으로 연꽃받침 위에 올려져 있다. 경주 보리사의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과 같이 광배 뒷면에 불상을 새긴 경우는 가끔 있지만 가마 모양을 새긴 것은 이 광배가 유일하다.

​대좌는 불단에 가려져 있어서 옆으로 돌아가 들여다보아야 한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팔각 하대석을 놓고 귀꽃이 반짝반짝 선 복련대를 올렸으며 그 위에 밋밋한 팔각 굄돌을 놓은 후 굵은 구름무늬를 새긴 중대석을, 또 그 위에 앙련을 두른 연꽃 상대석을 놓았다. 대좌의 조각 또한 광배 못지않게 화려하고 복잡하다. 우선 하대석 8면 가운데 네 면에는 안상 안에 향로를 새기고 두 면에 꽃무늬를 두었으며 나머지 두 면에는 비천상을 2좌씩 조각했다. 중대석에는 웅장한 구름무늬 속에 한 면에는 연꽃 봉오리를, 다른 일곱 면에는 짐승의 얼굴을 조각했다. 짐승의 머리는 모두 날카롭고 사나운 표정으로 상하좌우 각 방향을 보고 있다. 상대석에도 앙련 꽃잎 안에 잎이 풍성한 꽃잎무늬를 새겨놓았다. 이처럼 대좌를 호화롭게 만드는 양식은 신라 하대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를 청양 장곡사 비로자나불 대좌에서 볼 수 있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전형적인 불상들 같은 긴장된 힘이나 세련된 기교는 볼 수 없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가장 뛰어난 통일신라 말 불상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보물 제433호이다.

출처: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두신광을 표현한 선 위에 새겨진 화불"

"비로전 거북 등 위에 올려진 커다란 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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