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원백암마을

2021. 8. 16. 06:45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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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원백암마을]

원백암 마을의 유래(원백 암은 명산 태조봉이 좌우로 분지 하여 아늑한 영세불멸지를 이룬다. 태인군의 남촌 일변면 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보면 백암리로 되었다. 원백암이란 마을에 흰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원백암 마을에는 24방위에 맞추어 당산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점점 없어지고 현재는 12 당산이 보존되어있다. 그 가운데 마을 어귀의 보존되어 있는 남근석은 지방문화재 민속 제13호로 유명하다.

당산은 예로부터 모든 액을 물리치고, 막아주며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에서 가장 신성시 하는 풍습으로 매년 정월 초사흘 날 당산제를 모신다.

원백암은 1676년 숙종2년 효행으로 명정이 내리고 벼슬을 받았던 진휼로 유명한 모은 박잉걸 선생의 성장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모은 선생은 굴치와 구절재의 길을 닦고 대각교를 사재로 건설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복과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니 그 유적이 바로 걸치기이다.

걸치기는 모은 선생이 의복과 신발을 이곳에 걸쳐 놓고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가져다 입도록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때 강증산의 소요처로 무극대도교 속칭 도집이 자리 잠고 있다가 60년대에 훼철 되었다.)


[원백암 마을의 유래]

원백암은 원래 태인군의 남촌 일변면의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보면 백암리로 되었다. 백암이란, 마을뒷산에 흰바위가 곳곳에 있어 붙인 이름이라한다. 우리 마을에는 원래 24방위에 맞추어 세운 24개의 당산이 있었다한다. 24개의 여러 형태로된 당산은 오랜세월이 지나는 동안 점점 없어지고 현재는 몇개의 당산이 마을 주위에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마을앞의 남근석이 유명하다.

당산은 마을에서 가장 신성시 여기는 것으로 매년 정월초사흩날 당산제가 열린다. 원백암은 1676년 효행으로 명정이 내리고 벼슬을 받았던 진휼로 유명한 모은 박잉걸 선생의 성장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모은선생은 굴치의 길을 닦고 대각교를 사재로 놓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복과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니 그 유적이 바로 걸치기이다. 걸치기는 모은선생이 의복과 신발을 이 곳에 걸쳐놓고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가져다 입도록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때 강증산의 소요처로 무극대도교 속칭 도집이 자리잡고 있다가 60년대에 훼철됬다.


[날당산]

708번 도로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대각선으로 있는 하천 아래에도 1기가 서있습니다. 마을(가정)에 나쁜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킴이 수호 당산이라 부른다.


[원백암 당산나무, 남근석, 할머니 당산]

칠보면 소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암리가 있다. 도로변에 바로 붙은 백암마을에서 칠보천을 따라 뻗은 마을길로 조금 더 들어가면 원백암이라 불리는 마을이 나온다. 선이 부드러운 야트막한 산으로 뒤와 옆이 아늑히 싸인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작은 다리 한켠에는 커다란 당산나무와 남근석이 있고 그 옆에는 입석과 돌장승이 세워져 있다. 주변을 좀더 둘러보면 다리 건너편에 입석이 또 하나 있고 좀더 떨어진 논 가운데도 장승이 있어 당산나무 밑의 장승과 마주보고 있다.

예전에는 이 부근에 예닐곱 개의 큰 바위가 있었고 대추나무가 많아 숲정이라 불렸는데, 이 마을의 입구가 너무 트여 지세가 흩어지는 형국이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숲을 조성하고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마을의 앉음새와 주변의 지형, 당산의 위치 등을 살펴보면, 적당한 조형물이나 인공 숲을 만들어 마을의 허전한 곳을 보완함으로써 아늑한 삶의 공간으로 순화시키려 했던 것을 납득할 만하다.

흔히 장승을 비롯한 각종 신앙물들은 마을의 출입구에 세워져서 밖으로부터 재앙이 드는 것을 막고, 마을의 안과 바깥을 구별하여 사람이 마음 놓고 살 만한 공간으로 지켜주며, 풍수적으로 완벽한 공간을 일구는 역할을 한다. 이 마을의 장승 또한 일반적인 액막이 역할 이외에 마을의 생기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 수구막이 역할도 한다. 두 장승 모두 2m 남짓한 높이로, 대충 다듬은 두툼한 돌기둥의 얼굴 부분에 퉁방울 눈과 주먹코, 꼭 다문 작은 입이 표현되어 있다. 당산나무 옆 장승의 코는 거의 마멸되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남근석]

남근석은 장승과는 달리 세심하게 다듬어져 약 1m 높이의 네모진 대석 위에 당산나무 쪽으로 약간 기운 채 세워져 있다. 높이는 1.3m 가량 되는데, 당산나무 둥치의 같은 높이쯤 되는 곳에 길게 갈라진 틈이 있어 함께 음양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남근석은, 조선 숙종 때 정삼품 통훈대부를 지낸 박잉걸이라는 사람이 건너편의 여근곡과 여근암 때문에 마을에 음기가 센 것을 누르고 마을이 번영하도록 하기 위하여 장승과 함께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세우고부터 마을 사람들의 자손이 번창했다고 한다. 여기에 큰절을 네 번 하고 주위를 돌며 절한 후 안아주면 아이를 갖는다는 전설이 있어, 예전에는 부인들이 음식을 차려가지고 밤에 몰래 와서 제사를 지내며 아들 갖기를 빌었다.

생산력이 일손의 수에 좌우되던 전통 농업사회에서 인구의 증가는 곧 부의 증가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 상징인 남근석은 생산력과 부, 다수확 같은 본래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갖가지 액과 살을 막아주며 소원을 두루 이루어준다는 넓은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남근석은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기에 해를 끼치면 눈이 멀게 된다는 속신(俗信)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남근석과 당산나무"

길게 갈라진 당산나무 둥치의 틈새는 남근석과 함께 음양을 상징한다.


"원백암 표석, 할머니 장승, 남근석과 당산나무"


[할머니장승]

눈이 툭 불거지고 얼굴이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무섭게 생기지는 않았으며, 코가 잘린 것처럼 두리뭉실하게 되어있다. 농사짓는 일손이 풍요했던 시기에 아들을 낳기 위해 장승의 코를 만지거나 갈아서 마시면 효험이 있다는 설이 전해진다.


[할아버지장승]

할머니 장승보다 투박한 모양이며 눈도 툭 불거진 모습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 장승에게 빌면 자손이 대대로 많아서 집안이 번창 하게 된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칠석돌당산]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간절히 해후를 기다리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견우와 직녀의 돌당산이다.


"원백암마을 뽕나무와 오디"

아직 덜 익어 검은색 오디도 단맛이 덜하다. 오디의 크기가 굵고 길다.


[행운돌 당산]

행운을 상징하는 돌당산으로 소원을 빌면 재물복이 생긴다고 전해진다.


"할머니 당산목과 거북돌 당산"


[할머니당산목]

마을 뒤쪽에 있는 느티나무로 거북돌당산. 후모정과 함께 있으며 거북돌당산 외 2개의 커다란 바위와 함께 있다.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매년 정월달에 자손들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거북돌당산]

할머니당산목인 느티나무 옆에 누워있는 거북모양의 당산을 말한다.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매년 정월달에 자손들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누운돌당산]

집안의 안녕과 행복,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평화를 기원하는 돌당산이다.


[할아버지 당산목]

이 나무는 후계목인데 모수로서의 당산목은 대단히 큰 느니타무였으나 불에 전소되었다. 자손이 출세하도록 소원을 빌어 높운 벼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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