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고부향교&군자정

2021. 8. 17. 05:11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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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동학울림센터(동학농민혁명 발원지 고부,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전봉준,김개남,손화중) 3인상 조형물)


"고부향고 홍살문과 하마비"

"고부향교(내삼문, 명륜당, 양사재)"

"보호수 수령 400년 고부향교 은행나무"

문화재자료 고부향교대성전(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부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0년(159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직사,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등이며,전해오는 유물로는 제기, 제복, 서적들이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출처:문화재청)


옛 고부관아터에서 자리한 고부향교, 고부초등학교(오늘날 고부는 정읍시에 딸린 면이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정읍보다 더 세력이 큰 고을이었다. 봉건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고을의 물산이 풍부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관리에게 뜯길 일이 많다는 것으로, 오히려 주민의 고달픔을 더해주는 일이었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해온 조병갑은 그 전에 있던 수령들보다 한층 더 악랄하게 수탈을 일삼았다. 주민에게 이러저러한 누명을 씌워 잡아들였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거나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둔 것 등은 다른 부패관리들도 다 해온 짓이었지만, 그는 한술 더 떠서 필요도 없는 새 보를 쌓고는 가혹하게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조병갑의 탐학에 대한 고부 사람들의 분노는 1894년 1월 10일 봉기로 터져나왔다. 다음날 새벽에 고부 관아가 접수되고 조병갑은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달아났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옥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헐어 양곡을 나눠주었으며 무기를 나눠 가졌다. 당시의 관아 건물은 없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이곳이 조병갑이 오가던 곳이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잡혀와 시달리던 곳이며, 농민들이 물세감면을 진정하기 위해 긴장된 걸음으로 들어서던 곳이며, 또 그날 횃불을 든 농민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곳이려니 되새겨볼 뿐이다. 초등학교 바로 옆의 향교 건물과 학교 뒤편에 남아 있는 고부읍성의 흔적이 고부의 옛날을 짐작하게 한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북도기념물 고부관아터(영조 41년(1765년) 성황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편입될때 까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적 현장이다.

고부관아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아건물은 전부 철거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전통문화유산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운동장 한켠에 보이는 초석, 기단석 등 석조물이 이곳이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전라북도유형문화재 군자정(고부리 지방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예로부터 고부마을의 운세와 얽혀있는 설화가 전해오는 연정이다. 연못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4면이 연꽃으로 둘러싸여 있어 연정이라 하였다 한다. 여기에서 연은 ‘연화지군자자야(蓮花之君子者也)’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정이란 이름이 군자정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영조 40년(1764)에 이세형이 수리하고, 1900년에는 조규희가 연못을 파내고 고쳤으며, 1901년에 다시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성하였다.

이곳에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조선 중기 이후 고부마을에 인재가 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없고, 군수들이 온지 1년도 안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연정이 황폐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서 현종 14년(1673)에 이후선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수리하였는데 그 후로 인재가 나왔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 향교의 위치가 관아보다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운이 막힌다는 전설이 있어서 영조 41년(1765)에 동헌을 지금의 고부초등학교로 옮겼다고 한다. - 출처:문화재청)

"군자정과 부서진 비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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