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전설을 간직한 천년 고찰,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1. 10. 11. 10:41바롱이의 쪽지/강원도

반응형

"신령한 전설을 간직한 천년 고찰"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는 원주 8경중 제1경으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이 666년문무왕 6창건하였다고 하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 절터의 깊은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비를 내려 온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물이 말라버리고 용 아홉 마리는 도망쳤다고 한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도선.무학.휴정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으뜸 사찰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06년(숙종 32)중수되었고, 여지도서 원주목조에는 ‘구룡사는 85칸이다. 치악산 북쪽에 있다. 절 앞에 용연이 있는데 홍수나 가뭄이 들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구룡롱사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안석경(1717~1774)의 삽교집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대승암과 백련당, 월봉암등 선승들이 살았던 암자와 호랑이를 만난일 등 구룡사 주변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절의 지정 문화재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던 대웅전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보광루가 있다. 대웅전은 2003년 화재로 불에 타고 지금 대웅전은 2004년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그 밖의 건물은 삼성각.심검당.설선당.적묵당.천왕문.종루.일주문.국사단등 모두 19동이 있다.

구룡사에 이르는 길에는 곧게 자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와 관련이 있다. 매표소 부근에 있는 황장금표는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지하는 표시로, 구룡마을 입구와 치악산 정산 부근에 황장외금표가 함께 남아 있는데 이러한 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강원도 기념물 학곡리황금장표(鶴谷里黃腸禁標)]

치악산 내의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황장목(黃腸木)의 보호를 위하여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하는 경계의 표시이다.

황장목은 나무의 안쪽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질이 좋은 소나무로서 왕실에 올리는 특산물 중의 하나이며, 궁에서 신관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치악산은 질이 좋은 소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관아가 가까이 있어 관리도 유리하였고, 한강의 상류에 자리하여 뗏목으로 한양까지의 운송이 편리하여 전국에 있는 60여 개소의 황장목 보호림 가운데에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다. 

금표는 작은 바위의 한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글귀를 새긴 모습으로, 최근에 ‘금’자와 ‘표’자 사이의 윗부분에 ‘동(東)’자가 새로이 발견되었다. 구룡사 입구에서 100여m 정도 내려가면 도로가의 흙속에 일부가 묻혀 있는 1기의 금표가 더 남아 있는데, ‘금표’의 글귀 윗부분에 ‘외(外)’자가 보인다. 

이렇듯 보호림 구역을 만들어 표시를 해놓는 제도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생겨난 것으로, 강원도에는 이곳 외에도 인제, 영월, 양양 등에 있다.

출처:문화재청


구룡교 거북이와 용 조각상, 원주 치악산 구룡사 일주문


구룡사 부도전(승탑은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부도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때 만들기 시작하였고, 주로 사찰 입그 근처나 사찰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다. 승탑은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의 팔각 원당형 승탑과 ‘종’ 모양의 석종형 승탑 등이 있으며, 구룡사 부도전은 석종형 승탑으로 조선 시대에 주로 유행한 양식이다.)


국사단, 전나무, 소나무 줄기 사이에 자란 어린 나무


"거북바위 전설"

거북바위(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 때 어느 날 도승 한 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쓴 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한다.

출처:원주시청)


보호수 수령 200년 구룡사 은행나무


사천왕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원주구룡사보광루(原州龜龍寺普光樓)]

보광루는 치악산 중턱에 위치한 구룡사의 불이문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구룡사의 진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밑을 지나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출처:문화재청


구룡사 전경


화재로 소실되어 문화재 해제됨(2004.01.17), 구룡사 대웅전 옛 모습(조선초기에 개축된 대웅전은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어서 낡았지만 손을 댈 수 없는 각별한 건물이다. 법당 안에는 조선시대 목조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삼존불 위 닫집은 조선시대의 조각솜씨가 잘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글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진 출처:문화재청)

구룡사 대웅전 현재 모습


“아홉 마리 용 전설”

구룡소(명산인 치악산에 큰절을 세우고자 한 스님이 찾아 들었다.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이때 이 연못 속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들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 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 수 있소?"하고 항의 했다. 그러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떡하겠나?"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갱이를 벌이다 용 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 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먹구름을 불러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 데까지 잠겨버렸다.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 쪽에서 볼 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 수 부려볼까?"

스님은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더니 연못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들은 견딜 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 중 눈먼 용 한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음으로써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 앉게 되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 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 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九) 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원주시청)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