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내륙 최고 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

2021. 10. 29. 06:46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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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서내륙 최고 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홍천읍에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우며,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락, 눈 덮인 겨울산도 일품이다. 

공작산생태숲은 수타사 일원 163ha 의 넓은 산림에 공작산과 수타사 주변 자생식물 및 향토 수종을 식재·복원한 역사문화 생태숲, 다양한 숲 속의 주제를 체험·탐구 할수있는 교육·체험 생태숲, 생태숲으로서 기존 숲의 유전 자원을 보호하는 유전자보전의 숲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타사에서 영귀미면 노천리까지 약12km에 이르는 수타사 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沼)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고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히 우거진 숲이 호위하고 있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보면 비경삼매에 빠져들기 일쑤이다.  또한 한국 100대 명산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수타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7년(서기 708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적광전 팔작지붕과 1670년 만든 동종,고려후기에 세워진 3층석탑이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를 비롯한 대적광전, 범종, 후불탱화, 홍우당부도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영서내륙 최고 고찰이다.

출처:홍천군청


[강원도 문화재자료 수타사홍우당부도(壽陀寺紅藕堂浮屠)]

수타사로 들어가는 길 옆에는 7기의 부도가 서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 두는 곳으로, 이 부도는 ‘홍우당’이라는 호를 가진 승려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땅 위로 드러난 사각 바닥돌 위로,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두고, 납작한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닥돌을 제외한 대부분이 6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옆면마다 선으로 무늬를 새기고, 윗면에는 두 겹의 연꽃잎을 둘러 새겼다. 가운데받침돌은 여섯 모서리에 마디가 있는 작은 기둥을 새겨두고, 면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무늬를 두었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두툼한 연꽃잎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섯 모서리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모서리에서 미끄러지는 각 귀퉁이가 위로 솟아있다.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공 모양과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차례로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6각으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구성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즈음에 이 부도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수타사삼층석탑(수타사는 본래 신라 성덕왕 7년(708)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산세가 아름다운 우적산(牛跡山)에 세워지고 일월사(日月寺)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이미 686년에 입적했으니 창건자 아니면 창건연대에 오기(誤記)가 있는 듯하고, 수타교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올라보면 잡풀이 우거지긴 했지만 남향의 꽤 너른 터전이 눈에 띄는데 여기가 곧 일월사터다. 창건 이후 영서지방의 명찰로 꼽히면서 고려 때까지는 선(禪)수행 도량으로 번창해온 절터에 지금은 앙증맞은 삼층석탑 1기만이 홀로 서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강원도 문화재자료 수타사삼층석탑(壽陀寺三層石塔)]

수타사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2·3층 몸돌이 없어진 탑신은 남아 있는 1층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뾰족하게 치켜 올려갔고, 밑면에 1 ·2층은 3단, 3층은 2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동그란 돌 하나가 남아 있다.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각 층의 지붕돌 너비가 거의 줄지 않고 있어 원래는 높고 날렵한 큰 규모의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홍천 공작산 수타사 봉황문(수타사의 사천왕문은 봉황문이다. 봉황문 내부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서 있으나 편액은 봉황문으로 걸려 있어 지세에 얽힌 내력이 봉황문에도 이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74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유난히 낮은 건물 봉황문 앞에 서면 바로 앞에 흥회루, 그 앞에 절마당, 대적광전 계단까지 한달음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여서 매우 희한하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강원도 유형문화재 홍천수타사소조사천왕상 (洪川壽陀寺塑造四天王像)]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수타사의 봉황문 좌우에 모셔져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절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현종 15년(1674)에 법륜이 봉황문을 세우고, 2년 후인 숙종 2년(1676)에 여담이 사천왕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분노하는 듯한 얼굴과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모두 악귀를 거느리고 있다. 사천왕상의 배치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것에서 차이가 있지만 기본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각각 긴 칼, 깃대, 용과 여의주, 비파 등을 가지고 있다.

사천왕상의 높이는 3.2m이고 머리 높이는 1.12m, 어깨 너비 0.73m, 무릎 너비는 1.52m이다. 나무로 기본형태를 잡은 후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빚었다. 머리 뒤쪽의 불꽃무늬와 사천왕상이 가지고 있는 물건 등에는 부분적으로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완주 송광사의 보물 제1255호 사천왕상(1649년)과 함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특유의 위세 있는 얼굴 표정과 짜임새 있는 신체 균형, 사실적인 세부 표현 등에서 정교함이 돋보인다.

출처:문화재청


홍천 수타사 소조사천왕상(봉황문 안의 사천왕상은 1676년에 조성했는데, 좌우의 사천왕상을 면밀히 뜯어보면 재미있다. 가람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본디 임무는 그렇다 치고, 각 사천왕의 좌우에 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등 8부신중이 시립하고 서 있어 전국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배치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의 갑옷·장식·화염조각 등이 화려하고 뛰어나 지정문화재로 채택하기에 손색이 없을 듯싶다. 나무창살을 높이 세워 한눈에 볼 수 없는 것이 흠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동방지국천왕과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과 북방다문천왕"


[강원도 유형문화재 홍천 수타사 흥회루 (洪川 壽陀寺 興懷樓)]

1658년(효종 9)에 건축된 홍천 수타사 흥회루는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보기 드문 누강당 형식의 건물로, 창건된 이후 근대에 들어와 일부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적인 평면과 구조, 공포와 가구, 세부 형식 등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두 상부 주심선상에 재주두와 같이 주심소로를 사용한 사례 등은 조선후기 건축물의 양식적 특징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흥회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이다. 자연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놓았는데 건물 규모에 비해 기단이 낮아 배수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초석도 자연석을 썼는데 형태가 아주 자유롭다. 기둥은 평주 12개, 좌우 측면 고주 4개, 건물 중앙에 세운 심고주 4개를 세워 가구를 결구하였다. 모두 원형기둥이며 정연한 계획 하에 치밀하게 가공된 모습이다. 대개 사찰의 누각은 기둥재를 자연 상태의 원목을 껍질만 벗겨내고 거칠게 마감하는 사례가 많은 데 비해 흥회루처럼 치밀하게 가공한 기둥은 흥회루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구구조는 1고주 5량가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일반적인 고주가 아니라 평면 중앙에 심고주를 세운 독특한 방식을 따랐다. 이로 인해 대들보 대신에 심고주를 중심으로 맞보를 결구하고 맞보 상부에는 종보를 걸구하였다. 건물 좌우 측벽은 2고주 5량가로 가구를 구성하였다.  보는 총 8개의 맞보와 6개의 종보를 썼는데 좌측면에 쓰인 맞보 하나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보가 거의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만큼 형태와 크기 면에서 균일한 특징을 보인다. 곡선이 지거나 휘어져 있는 보를 찾기 어려워 목재 수급에서부터 치목에 이르기까지 매우 공을 들여 건립한 건물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동자주는 주두를 더한 듯이 가공되어 있고, 반자 내부에 가려진 대공은 단청까지 칠해져 있어 원래 노출된 부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공은 고식에 속하는 형태로서 매우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평주에 결구된 창방 단면은 양볼을 깎아내어 기둥 모습을 도드라지게 처리하였는데 이런 방법은 기둥 모양에 맞춰 결구하는 방식에 비해 고식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공포는 주심포식 공포를 결구하고 있으며 출목은 외1출목이다. 출목거리는 전후 모두 320㎜이다. 정면과 배면 공포는 부재 형태가 유사한 듯하면서도 세부 구성은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살미는 유사하지만 첨차는 전혀 다른 형태여서 건립초기부터 의도한 것인지 후대의 교체인지는 알 수 없다. 흥회루에 사용된 소로 중에서 주두 상부 주심선상에 재주두와 같이 주심소로를 사용한 점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런 모습은 조선초에 만들어진 주심포 건축에서 확인 할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건축물들 가운데 이 지점에 주심소로를 사용한 사례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매우 작은 처리방식이지만 흥회루의 건축적 가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가구구조 가운데 도드라진 점은 측면 중앙에 심고주열을 세워 구조를 짠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건물 중앙에 심고주열을 세운 사찰 누각은 고운사 가운루, 선운사 만세루 등을 들 수 있으나 대부분 사찰 누각에서는 중앙에 고주를 세우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심고주를 세울 경우 내부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출처:문화재청


"수타사 흥회루 전시회, 목어, 여유"


흥회루 법고와 법고대(아래서부터 4개의 단을 놓고 그 위에 활짝 핀 연꽃을 조각한 다음 8각형의 소담스런 보주를 얹었다. 보주 위엔 연밥, 다시 4개의 단을 설치한 다음 십자형의 대를 놓고 그 위에 북을 올려놓았으니, 법고대는 곧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서 울려퍼지는 법고소리는 곧 세상을 일깨우는 법음(法音)이리라. 북의 덩치에 비해 대가 약해보이는 흠은 있지만 이와 같은 법고대를 보기란 드문 일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사인비구 제작 동종 - 홍천 수타사 동종 (思印比丘 製作 銅鍾 - 洪川 壽陀寺 銅鍾)]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주변에 굴곡진 화문을 첨가한 독특한 당좌로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룡사 동종이 만들어진 1670년에 그 보다 3개월 뒤에 만들어진 종임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강원도 유형문화재 수타사대적광전(壽陀寺大寂光殿)]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세워 일월사로 불렸다고 전한다. 조선 선조 2년(1569)에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인조 14년(1636) 공잠대사가 대적광전을 다시 짓고 이후 차례로 건축물을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적광전은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 앞면과 옆면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수타사 대적광전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는 조선 후기 불전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홍천 수타사 대적광전(수타사의 중심 건물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법당 뒤 산세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아담한 규모에 부재간의 비례가 좋아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목조건물 중 하나다. 편액 ‘大寂光殿’(대적광전) 양옆으로 석가모니불 3구씩이 배치되어 특이하고, 지붕의 39개 수막새 기와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백자를 얹은 것도 선명하게 눈에 띈다. 정면의 문은 가운데칸에 4분합(四分閤) 띠살문을 달고, 양쪽 옆문은 2짝 분합의 빗살문을 달았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붕의 39개 수막새 기와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백자를 얹은 것도 선명하게 눈에 띈다. 기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처마 끝의 수키와를 서까래에 고정시키는데, 이때 사용하는 긴 못을 '방초정(防草釘)', 또는 '와정(瓦釘)'이라고 한다. 못 박은 자리에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물로 그 위를 덮는데, 불전 지붕을 장엄하는 효과도 하고 있다. 


 

대적광전 내부 모습(법당 안에는 지권인(智券印)을 한 비로자나불상 하나만 안치되어 있는데, 불단과 닫집이 화려하다. 불단 맨 아래쪽에 새겨진 구름무늬, 천장의 닫집에선 아래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황룡 한 마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생동감 넘치는 연꽃들, 추녀끝에 매달린 풍령, 좌우에 극락조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옷깃을 펄럭이며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들이 사실적이다. 닫집 서까래 밑에 앙증맞게 붙어 있는 편액 ‘寂滅宮’(적멸궁)도 눈길을 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특히 닫집 옆에 있는 대들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이들 아래로 6개의 종이 달려 있다. 이는 큰 불공이나 재가 있을 때 실제로 사용했던 악기인데, 지금도 법당 뒤쪽으로 줄이 연결돼 있어 필요에 따라 이 악기를 울릴 수 있다고 한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좌우에 극락조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옷깃을 펄럭이며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들이 사실적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강원도 유형문화재 홍천 수타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洪川 壽陀寺 木造觀音菩薩坐像과 腹藏遺物)]

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1758년(건륭23) 5월에 강원도 홍천 공작산 수타사 옥수암에서 화승 순경(順瓊), 덕순(德淳)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된다.

불상을 조성한 화승 순경과 덕순은 1739년에 수화승 초흠과 서울 학림사 괘불도를 조성한 화승들이다. 불교조각사에서 18세기 중반은 불상의 조성과 개금에 불화승들이 점차 참여하게 된다. 순경이 제작한 목조보살좌상은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목조보살좌상(1655년, 조각승 혜희), 공주 마곡사 청련암 목조보살좌상(1701년, 조각승 마일)과 비교해보면 신체비율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커지고 대의자락이 도식적으로 변하였으며, 얼굴 이목구비는 타원형에서 방형으로 변하게 된다. 이와 같이 18세기 중반 불화승들이 제작한 불상은 앞선 시기 조각승들이 제작한 불상보다 인상이나 대의처리 등이 단순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발원문을 통해 조성연대와 작가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년명 불상이며, 다라니ㆍ후령통 등의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는 등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우수하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수 올리는 석조물(대적광전 앞 화단에는 여느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청수(淸水)를 올리는 석조물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예전 큰절에는 돌바루도 있었다는데, 아래 둥근 받침에는 복련이 피어 있고, 그 위로 사각형의 긴 대가 쑥 올라와 머문 지점에 대접형으로 석물을 다듬어 앙련을 피어나게 새겼다. 그 위에 청청수를 올렸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맷돌바위"


우물터와 왼쪽 마당 끝엔 수타사와 역사를 같이한, 수령 500년의 주목(朱木)이 있었는데 몇 해 전 고사했다고 관계자분이 말씀하신다.


"연지에서 바라본 수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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