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봉은사

2021. 11. 21. 05:25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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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은사]

봉은사(奉恩寺)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조계종 사찰이며,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암(見性庵)이란 이름으로 창건(創建)했다.[1]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했던 고승으로 원성왕에 의해서 국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견성암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들어 견성암은 수도산 아래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름도 봉은사로 고쳐 부르고 당시 불교중흥의 중심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성종의 아들이었던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지만 기행과 폭정을 일삼다가 이복동생이었던 진성대군의 반정으로 물러나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이다.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특별히 봉은사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중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붕어하자 다음 왕위에 오른 사람이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이후 8년 동안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는데, 8년의 섭정이 끝난 후에도 한 동안 문정왕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문정왕후는 폐지된 승과고시를 부활해서 봉은사에서 승려를 뽑는 승과고시를 치르게 한다. 또한, 당대 고승인 보우대사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는 한편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후 승과고시를 통해 배출된 서산, 사명, 벽암 등의 고승들이 연이어 이곳 봉은사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숭유억불의 기조 속에서도 봉은사를 중심으로 조선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출처:위키백과

봉은사 진여문


"봉은사 진여문"


[허응당 보우대사 동상]

명종대가 되면 이제 봉은사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실권을 쥐게 된다. 평소 불교를 신봉하던 그녀는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승 보우(普雨)를 등용해 침체된 불교의 중흥을 꾀하는데, 봉은사가 바로 그 중심에 있게 된다. 문정왕후는 우선 명종 5년(1550) 12월, 우의정 상진(尙震)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중종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던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명한다. 이에 따라 봉선사는 교종을 대표하는 교종수사찰(敎宗首寺刹)이 되고 봉은사는 선종을 총괄하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며, 보우스님은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주지’(判禪宗事都大禪師奉恩寺住持)라는 직함을 띠고 이곳 봉은사를 무대로 불교 중흥에 앞장서게 된다. 또 문정왕후는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승과(僧科)를 다시 실시토록 한다. 승과는 명종 7년(1552) 봉은사 앞 벌판에서 첫 시험이 치러진 이래 문정왕후가 승하한 이듬해인 명종 21년(1566) 혁파될 때까지 식년(式年), 즉 3년마다 한 차례씩 실시된다.

보우는 또한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 가까이로 옮겨 장차 문정왕후를 합장케 함으로써 불교 중흥의 대세를 이어가고 봉은사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그의 계획은 문정왕후의 정치적 계산과 맞아떨어져 마침내 명종 17년(1562) 봉은사를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고 절이 있던 자리로는 중종의 능, 곧 정릉(靖陵)을 옮겨온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명종 18년, 명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왕세자가 죽자 후사를 잇기 위해 보우의 권유에 따라 양주 회암사에서 대대적인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준비하던 도중 문정왕후가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정 안팎의 반대 속에서 오직 문정왕후에 의존하여 불교 부흥을 꾀하던 보우는 하루아침에 요승으로 지목되어 빗발치는 탄핵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어 조정의 명을 받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장살(杖殺)되고 만다.

이렇게 보우의 노력은 중도에 꺾이고 말았지만 그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시대 불교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단적인 예로 조선시대 불교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대사 유정이 모두 명종대에 실시한 승과를 통해서 배출된 인재들이며 이후 조선 불교의 굵은 물줄기가 이들에게서 발원하는 것만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남호대율사비]

남호 영기(南湖永奇, 1820~1872)스님은 저 유명한 판전의 화엄경판을 판각한 분이다. 경판을 봉안하기 위해 새로 지은 집에 안치된다. 그 건물이 바로 판전이고, 현판 글씨는 흔히 추사의 절필작이라고 말하는 그 작품이다. 아마 그때 스님의 판각 작업이 없었다면 판전도 지어지지 않았을 테고, 따라서 유명한 추사의 ‘판전’ 글씨는 탄생조차 않았을 것이니, 문화사적으로도 스님의 『화엄경』 판각은 소중한 의미를 띠고 있다 하겠다. 남호율사비는 스님의 이러한 행적을 전하고 있는 비석이다. 다행히 지금도 그때의 경판과 판전이 남아 있으며, 추사의 글씨도 여전히 현판으로 빛나고 있는데다 그 내력을 담고 있는 비석까지 남아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문에 의하면 스님은 당시 『화엄경』뿐 아니라 『별행』(別行) 1권, 『준제천수합벽』(準提千手合璧) 1권, 『천태삼은시집』(天台三隱詩集)도 아울러 판각했다고 한다. 비는 스님이 타계한 지 3년이 지난 고종 12년(1875)에 세운 것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수해구제공덕비(수해구제공덕비 또한 희귀한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1925년 한강을 범람케 한 을축년 대홍수는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언급될 만큼 유례없이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봉은사의 주지로 있던 나청호(羅晴湖)스님은 절의 재물을 모두 풀어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무려 708명이나 구해냈다. 일제의 총독부조차 손을 놓고 있던 상황에서 한 승려와 사찰의 힘만으로 이렇게 많은 인명을 구해냈으니 경향 각지에서 칭송의 소리가 자자했다. 그후 스님의 미담을 기리는 시와 그림과 글이 답지하게 되는데, 이것들을 모아 만든 「불괴비첩」(不壞碑帖)이 지금도 봉은사에 전해진다고 하며, 당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스님의 공덕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바로 이 수해구제공덕비이다. 고을 어귀마다 그곳을 거쳐간 벼슬아치들을 기리는 공덕비, 불망비, 선정비 따위가 늘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선정, 불망, 공덕과는 거리가 먼 것들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에 비하면 수해구제공덕비는 그야말로 공덕비다운 공덕비, 명실상부한 공덕비라고 할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명필로 이름이 꽤 알려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의 필적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선불당]

정면 8칸 측면 3칸에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평범한 건물이다. 그런데도 굳이 몇 마디 말을 붙이는 이유는 그 앉음새와 지붕 모양 때문이다. 앞에서 선불당을 정면 8칸 측면 3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통 대웅전 앞 좌우의 건물은 정면이 마당 안쪽을 향하고 있게 마련이다. 만일 그렇게 따진다면 봉은사 선불당은 정면 3칸 측면 8칸이 되어 우리 건축에서 좀체 보기 어려운 정면보다 측면의 폭이 훨씬 큰 앞뒤로 긴 장방형 건물이 된다. 실제로 건물의 현판도 그렇게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지붕이 문제가 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측면에 와야 할 팔작지붕의 합각부가 정면에 오기 때문이다. 이러니 어디가 정면이고 어디가 측면인지 구분이 어렵다. 그런데 지붕의 구조는 한 술 더 뜬다. 합각이 3칸 입면의 지붕에 앞뒤로 하나씩, 8칸 입면의 지붕에 앞뒤로 두 개씩 하여 무려 여섯 군데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붕 모양으로 보자면 정면 8칸 측면 3칸이지만 앉음새나 사용자의 의도로 보자면 정면 3칸 측면 8칸인 묘한 집이 선불당이다. 선불당 맞은편의 심검당 또한 사방에 합각이 하나씩 있는 흥미로운 집이긴 마찬가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봉은사 대웅전"

봉은사 대웅전 지붕 앞으로 서울 도심 빌딩숲이 보인다.


"대웅전 안 기도드리는 불자"


[대웅전 편액]

대웅전 편액은 추사의 글씨로,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진관사(津寬寺)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각한 것이라 한다. 이 글씨는 추사의 득의작은 아니라는 게 중평이고 워낙 판전 글씨에 눌려 덜 알려져 있긴 하나 가만히 바라보면 기교를 넘어선 졸박함에 추사 만년의 모습이 겹쳐진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서울 奉恩寺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은 조선 후기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이 수(首)조각승으로 9명의 보조 조각승들을 이끌고 제작한 상이다. 1765년의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1689년에 화재로 본존 석가상은 소실되어 새로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승일이 제작한 본존 석가상은 좌우협시상에 비해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모습이어서 조형적인 면에서 구별되나 착의와 수인(手印) 등은 17세기 중엽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존 석가불상은 좌우의 아미타불, 약사불과는 다른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발원문과 개금문을 통해서 삼세불의 봉안과 개금에 참여했던 시주자들, 조각을 담당했던 조각승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후기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문 설명]

The Wooden Seated Sakyamuni Buddha Triad of Bongeunsa Temple in Seoul was completed in 1651 by a group of monk-sculptors led by Seungil. A prayer written at the time of the 1765 re-gilding project reveals that the original Shakyamuni statue of the triad was destroyed by fire in 1689. 

The principle Buddha, carved by Seungil, is 30 centimeters taller than the two acolytes standing at his sides. He is wearing a robe draped over the left shoulder, leaving the right shoulder and the right part of the chest bare, and forms — with his right hand hanging down and his left hand resting on top of the knee — the mudra representing the expulsion of evil.

The style of the robe and the symbolic hand gesture show the influence of Buddhist sculpture of the mid-seventeenth century, making the work a fine source of knowledge on Korean Buddhist sculpture of the late Joseon period.

출처:문화재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홍무25년장흥사명 동종 (洪武25年長興寺銘 銅鐘)]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원래 장흥사 종이었는데, 언제 이곳 봉은사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종을 매다는 용뉴는 떨어져 나갔지만 몸체는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종 아래에 연화대를 두었고, 구름을 탄 보살과 종을 치는 당좌가 각각 1개씩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이 종에는 1392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종이다.

출처:문화재청


"탑과 기도"


"반가사유상, 날물곶, 미륵대불"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봉은사 판전 (奉恩寺 板殿)]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소재한 “봉은사 판전(奉恩寺 板殿)”은 1856년에 창건되고 1878년 중수된 단층 맞배집 목조 건축물로, 봉은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본 건물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인 동시에 예불을 드리는 불전(佛殿)으로, 경판보관 및 예불 기능을 병용하기 위하여 독특한 창호 구성을 갖추는 등 건축적 희소성이 있다.

정면 어칸 처마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판전(板殿)’ 두 글자가 양각되어 있는데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판전]

대웅전에서 왼쪽 옆으로 빠져나가 가장 고색이 깃든 전각을 찾으면 그곳이 바로 남호스님의 종교적 열정과 추사의 마지막 예술혼이 깃든 판전이다. 판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이익공집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창방과 장여 사이에 화반을 놓고 나머지 부분은 포벽으로 마감할 텐데 판전은 이 부분을 모두 재목으로 처리하였고 측면에도 칸마다 두 짝씩의 널문을 달았음이 눈에 띤다. 봉은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안으로 들어가면 불단을 제외한 삼면 벽에 설치된 판가(板架)에 경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경판은 모두 합하여 3,749장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3,175장이 남호스님이 판각한 화엄경판이고 나머지는 『유마경』(維摩經)·『금강경』(金剛經)·『아미타경』(阿彌陀經)을 포함한 15종의 경전 목판이라 한다. 판전 내부의 왼편 벽에는 불교를 보호하는 천신들을 그린 신중탱(神衆幀) 불화도 한 점 걸려 있다. 이 그림의 화기(畵記)에는 신분을 뛰어넘어 평생토록 추사와 아름다운 우정을 간직했던 초의(草衣)스님이 증명(證明)으로 참여하였음이 밝혀져 있다. 아마도 당시 추사가 봉은사에 머물며 판각 불사에 관여하고 있었으므로 추사와 인연이 깊었던 초의스님 또한 동참하게 된 것일 듯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 작품으로 「71과병중작」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정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김정희는 순조 9년(1809)에 생원이 되고,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증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전해오기로는 그가 「71과병중작」이란 글씨를 쓴 3일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죽은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판전]

편액에는 ‘板殿’이란 큰 글자 옆에 세로로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라는 잔글씨가 덧붙어 있다. 추사 71세 되던 1856년, 병을 앓는 중에 썼다는 얘기다. 이때 ‘병을 앓는다’는 말은 단순히 몸이 아프다는 뜻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추사는 불가와 관련 있는 글씨를 쓰거나 승려들에게 글을 보낼 때 흔히 ‘병거사’(病居士)임을 자처했다. 이 말은 병을 핑계로 부처님의 제자들과 일대 토론을 전개하여 그 내용이 경전으로까지 남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에 자신을 빗댄 것이다. 해동의 유마거사, 평소 추사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고 만년에는 더욱 그러하여 생활조차 불교 속에 한층 기울어져 있었다고 한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52년 풀려나 과천의 별서(別墅)인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추사는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학문과 예술과 불교에 몰두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추사는 돌아가기 몇 달 전인 1856년 여름 무렵에는 아예 봉은사에 거처를 꾸며 생활하고 있었다. 이때 몇몇 어른을 따라 추사를 방문했던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은 열세 살의 어린 눈에 비친 추사의 모습을 훗날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를 통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방 가운데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신재(身材)가 단소(短小)하고 수염은 희기가 눈 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같이 빛나고, 머리카락이 없고 중들이 쓰는 대로 엮은 원모(圓帽)를 썼으며, 푸른 모시, 소매 넓은 두루마기를 헤치고 젊고 붉은 기가 얼굴에 가득했고, 팔은 약하고 손가락은 가늘어 섬세하기 아녀자 같고, 손에 한 줄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제공들이 배례(拜禮)를 하였다. 몸을 굽혀 답하고 맞는데, 그가 추사 선생인 줄 가히 알 수 있었다.

1856년 9월이 되어 판전이 완공되자 추사가 생애 마지막 불꽃으로 피워올린 글씨가 곧 ‘板殿’ 두 글자이다. 이 글씨를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썼다는 말이 전해진다. 봉은사의 판전은 죽음을 앞둔 추사의 면모를 어제 일처럼 그려볼 수 있는 곳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봉은사 미륵전과 빌딩"


"봉은사 미륵대불"


"템플스테이 고무신"


[영산전 편액]

굵은 획에 예서체로 ‘靈山殿’이라고 쓴 글씨에는 획의 굵기만큼이나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글자의 구성이나 배치도 사전에 충분히 고려한 듯 ‘靈’자에서는 가운데의 ‘口’자 하나를 빼버려 복잡함을 피했고, ‘山’자는 위로 바짝 올려붙여 굵은 글자 셋이 나란히 놓일 때의 답답함을 시원스럽게 극복했다. 그러면서도 획과 획은 긴밀하게 짜여 엉성한 구석이 전혀 없다. 작자는 백련 지운영(白蓮 池雲英, 1852~1935)으로, 종두법을 실시했던 지석영의 형이자 20세기 초에 활약했던 문인화가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서울 도심 빌딩숲 석 사이에 봉은사 진여문이 살며시 보인다. 도심에 가까이 사찰이 위치하여 휴일과 평일을 막론하고 내.외국인들로 어수선하다.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시설이나 공간을 늘리다 보니 봉은사는 언제나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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