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2022. 3. 5. 10:02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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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우리 박물관은 한국 교육의 요람인 한국교원대학교의 특성을 살려 교육 분야를 특화한 교육박물관이며, 시설과 소장 유물 면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대학 박물관이자 교육박물관임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한 사회를 발전시키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분야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학문과 교육을 숭상하였으며, 우리 사회가 짧은 기간 동안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전 사회적인 교육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을 돌아보고 기억하고 체험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는 뜻깊은 일입니다.

우리 박물관은 한국 교육에 관한 유물을 전문적으로 수집, 정리, 보존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교육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교육사실, 교육테마실, 학교사실,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진 전시실을 통해 한국 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고, 교육체험실을 통해 부모 세대가 경험한 과거의 교육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교육 관련 유물을 더욱 폭넓고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여 교육사 연구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자 합니다. 또한 더욱 수준 높고 흥미로운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지역주민들이 자주 찾아오고 싶은 박물관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출처: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교육박물관 1층 교육체험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퇴계 이황과 도산서당"


"신나는 방학생활"


"학교 앞 풍경"


"학교 앞 풍경"


"우리 초등학교"


"우리 초등학교"


"우리 초등학교"


"우리 초등학교"


"국민체조"


"교육박물관 2층 한국교육사실I"


교육이란 무엇인가?

가르치고, 기르다. '가르치다'는 '갈다'와' 치다'를 합친말이다. '가르치다'는 나쁘고 거친 것을 다듬어 착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의미이며, '기르다'는 사람이나 동식물을 자라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기르다'는 것은 학습자의 선천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갈고 닦아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선사 시대 교육"


"삼국시대 교육, 남북국 시대 교육"

[삼국시대 교육(Education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정복을 통해 영역을 확대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배층은 새로운학문인 유학을 받아들이고, 그 영향으로 한자가 널리 사용 되었다. 이후 삼국에서는 체계적인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충효의 윤리를 장려한 결과 학문과 종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궁벽한 시골에서도 공부를 하다(The education in Coguryeo Gyeong dang)

정치 제도가 정비되자 고구려는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세워 귀족의 자제를 가르쳤다. 이곳에서는 태학박사가 유학과 역사서를 교육하였다.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유학과 함께 말타기, 활쏘기 같은 무술을 가르쳤다. 경당은 군사 훈련 단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선생님, 박사(The Scholar of Baekje)

백제에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으나, 다섯 가지의 유교 경전에 능통한 오경 박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높은 수준의 학교가 있었다고 점작할 수 있다. 또한 의박사(의술), 역박사(천문) 등이 있어 전문적인 기술 교육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는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왕인 박사의 기록을 통해, 백제에 높은 수준의 기술과 학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맹스런 신라의 젊은이, 화랑(Hwarang - An Elite Corps of Young Warriors)

신라의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해 전통적인 사회 규범을 배웠다. 화랑도는 촌락 공동체의 청소년 교육 집단에서 시작되어, 진흥왕 때 국가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이름난 산과 큰 내를 찾아다니며 사냥과 전쟁에 대한 교육을 받고 협동심과 단결심을 길렀다. 화랑은 원광의 세속오계를 따랐으며, 임신서기석에는 유교 경전을 공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남북국 시대 교육 Education in the Era of the South and North]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 대동강 이남에는 신라가, 이북에는 발해가 자리하면서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라와 발해는 민족 문화의 전통 위에 당 문화를 받아들여, 한층 세련된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 시기 유교 교육은 더욱 체계화되었고,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특히 두 나라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많이 보냈는데, 이들 중에는 외국인에게 보게 하던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많았다. 

충효의 이념으로 하나가 되다.(Unifying the Country through Teaching Thoughts of Loyalty and Filial Piety of Confucianism)

통일 신라는 국학이라는 교육 기관을 두어 6두품 이상의 귀족 자제를 교육하였다. 이곳에는 박사와 조교가 있어 논어와 효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가르치면서 충효 일치의 유교 윤리를 교육하였다. 관리를 뽑을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성적에 따라 관리로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처럼 통일 신라는 국학과 독서삼품과를 통해 유교 정치 이념을 보급하고 왕권 강화에 힘썼다.

바다 동쪽 큰 나라, 발해(Bal-hae, the Flourishing Land in the East)

발해는 주자감을 세우고 귀족 자제에게 한문학과 유교 경전을 교육하여 관리로 등용하였다. 발해의 높은 학문수준은 정혜공주 . 정효공주의 비문에 새겨진 세련된 한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앙 관청인 6부의 명칭으로 유교의 여섯 가지 덕목(인·의· 예•지·신·충)을 사용하였을 정도로 유학을 매우 중시하였다. 당나라는 이처럼 높은 학문 수준과 강성한 국력을 가졌던 발해를 해동성국(바다 동쪽의 강성한 나라)이라고 불렀다.


"고려 시대 교육"

[불교의 나라, 유교의 가르침(A NATION OF BUDDHISM, THE TEACHINGS OF CONFUCIANISM)]

고려 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유교는 정치와 관련해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의 학문으로, 불교는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수심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또한, 국자감이나 향교, 학당, 서당 등 교육 기관이 늘어나 배움에 참여하는 대상도 확대되었다. 고려시대의 교육은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관리 양성에 초점을 두어 과거제도와 밀접하게 운영하였기에, 유교 교육을 특히 중요하게 다루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근본은 불교(Buddhism - The Principle of Controlling One's Inner-self)]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교육 기관을 통해 가르침을 베풀지 않았지만, 백성을 통합하고 교화하는 사회 교육의 구실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승과를 두어 학식이 있는 승려를 뽑아 법계를 주었고, 덕망이 높은 승려를 왕사와 국사로 삼아 왕실의 고문 역할을 맡게 하였다. 나라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 등 여러 가지 불교 행사를 열었다. 이러한 불교 법회는 가르침과 배움의 장이면서 한편으로는 정보 교류와 문화의 장 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교육"

[유교 국가를 만들다(ESTABLISHING A NATION BASED ON CONFUCIANISM)]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적 지배 이념을 널리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기관을 설치하였다. 국가가 설립한 관학에는 중앙에 성균관· 4부 학당이, 지방에 향교가 있었다. 사학에는 서재와 서당 등이 있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서원이 설립되어, 지방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 의학 등 기술을 가르치는 관청을 두어 전문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백성들에게는 한글로 쓴 윤리 교육서를 보급하고 향약을 장려하여 생활을 유교적으로 교화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형식 교육과 비형식 교육이 어우러져, 교육의 폭과 깊이를 더욱 확대하였다.


"교육박물관 2층 한국교육사실II"


"개화기 교육"

[서양 문물이 들어오다(THE INTRODUCTION OF WESTERN CULTURE)]

1876년 일본과강화도조약을 맺은조선 정부는 1880년대에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서양 나라들과 통상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문물은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을 변화시켰다. 조선
정부도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고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교육"

[식민지 교육과 민족 교육(EDUCATION UNDER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NATIONAL IDENTITY EDUCATION)]

일본은 식민지 교육으로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켜 일본의 왕에게 복종하는 황국 신민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시기에 따라 표면적인 교육 정책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러한 교육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사립학교나 서당에서는 민족 교육이 계속되었다. 민족 운동가들이 세운 야학이나 강습소는 문명을 줄이고,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을 계속하였다. 학생들은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외로 이주한 동포들도 현지에 학교를세워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독립군을육성하였다.


"일제강점기 교육"


"해방~6.25 전쟁기 교육"

[자유로운 세상에서(In the World of Freedom)]

일제의 패망과 광복은 우리에게 새로운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그러나 삼팔선을 경계로 남북을 나누어 통치한 미국과 소련은 남과 북을 자국에 적합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민족 내부에서도 해방된 국가의 미래상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엇갈려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이는 결국 비극적인 전쟁을 가져왔다. 이 와중에도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대 교육"

[교육만이 희망이었네(Education Was the Only Hope)]

광복 이후 한국 교육은 가난과 전쟁 속에서도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며 자녀 교육에 힘을 쏟은결과, 높은 수준의 인적 자원이 배출되어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질적 발전이 양적 발전에 미치지 못하였다.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인해 사교육이 지나치게 팽창하고, 교육 불평등이 심화되는등 해결해야 할문제가 생겨났다.


"그때 그 시절"


"선생님의 일생"


"교육박물관 2층 학교사실"


"교육박물관 2층 교육테마실"


"숫자로 보는 한국 교육의 발자취"


"처음 만나는 교과서"


"한국의 교육열"


"우리들의 여행"


"시각장애인 교육"


"옛 책의 아름다움"


"공부방"


"청주를 Memo(利)하다! 청주를 감(感)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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