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영호루

2022. 3. 20. 05:14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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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영호루]

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 (1547년)의 대수(大水)로 누각은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重創)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하여 100여년 동안 안도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甲戌年) 대수(大水)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九潭)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향토애(鄕土愛) 짙은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였고, 드디어 안동시가지남편 강언덕인 정하동(亭下洞)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보게 되었다.

노송(老松)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鶴駕山)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이 시가지를 에워싼 영남산(映南山) 줄기는 철따라 색깔이 변하니,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은 온통 시가의 모습을 다르게 한다. 
일찍이 우탁(禹倬),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이황(李滉)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 했거늘, 다시 복원된 이 곳 누각에 올라, 눈아래 비단을 펼친듯한 대하(大河)와 경관을 바라보면, 그 누가 속세(俗世)의 시름을 잊지 않으리...

출처:안동관광


[안동역시비와 구 안동역]

중앙선 철도 복선화에 따른 철로 이설로 2020년 12월 17일, 안동역이 안동시 운흥동에서 버스터미널 근처인 송현동으로 이전했다. 2008년 가수 진성이 부른 ‘안동역에서’라는 노래의 무대였던 안동역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9년 구 안동역의 모습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안동역 한문 현판이 보인다.


안동 홈플러스 행복한 꿈, 금중기(우리시대의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각자 위치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날까? 작가는 소중한 가족의 모습을 곰에 비유하여 아빠곰은 온화하고 포옹하는 모습과 엄마곰은 빨간 하트모양을 안고 있고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아들곰의 모습이 모든 가족에게 행복한 꿈을 그리는 한 장의 사진 속의 이미시처럼 조형화 하였다.)


"안동교 조형물"


"안동교"


"낙동강과 중앙선 철로"


"영호루"


낙동상류 영좌명루(안동부사로 있던 김학순(1767~1845)이 1820년 훼손된 영호루를 중수하면서 쓴 현판이다.)


"영호루애서 바라본 안동시내 전경"


"영호루와 영호루중건기념비"


추강김지섭선생기념비(김지섭 열사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에서 태어났다. 1907년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상주보통학교 교사를 지내고,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 하여 금산지방 법원 서기 겸 통역관으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지섭 열사는 그 곳으로 망명하였다. 고려공산당과 의열단은 그가 활동하던 주요 단체였다. 1922년 11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도 참가하였다. 1924년 1월, 김지섭 열사는 도쿄 황궁으로 향한다. 그리고 도쿄 황궁과 제일 가까운 다리인 니쥬바시에서 폭탄을 던진다. 처음 던진 폭탄은 불발, 하여 재빠르게 2개를 더 던졌으나 이 역시 폭음만 낼 뿐 불발되고 말았다. 김지섭 열사는 그 자리에서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이시카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후에 치바형무소로 이감, 그리고 순국) 비록 실패로 끝난 의거였으나 도쿄 황궁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충혼탑"

충혼탑은 자유 민주주의와 국가수호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 영령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기 위해 건립되었다. 충혼탑에는 교육자·정치인이자 시인인 한솔 이효상 선생(1906-1989)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용사들의 영령이여

진리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가실 길 없는 님들의 넋이여

이나라 이겨례에 길이 밝은 등불이 되어 주소서

1965년 6월 6일 한솔 이효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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