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연미사.제비원

2022. 3. 26. 06:20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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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연미사.제비원]

제비원[燕飛院]이란 이름에서 ‘원’(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말한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 서울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다. 그 길목에 있던 것이 제비원이다.

제비원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연(燕)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인물도 곱고 마음도 착하며 불심 또한 깊어 이웃의 총각뿐 아니라 지나가는 과객들 또한 연이를 사모하였고 고운 마음씨에 탄복했다. 이웃마을에 김씨 성의 부자가 살았는데, 집은 부유했지만 마음씨는 나빠 다른 사람을 도울 줄 몰랐다. 이 집의 총각도 연이를 사모했는데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총각이 살아 생전에 악덕을 많이 쌓았으므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인데, 건너마을의 연이는 착한 일을 하여 선행의 창고가 가득 쌓여 있으니 좀 꿔서 쓰면 다시 살아돌아갈 수가 있다고 하였다.

저승에서 연이의 재물을 빌려 쓰고 살아난 총각은 이승에 돌아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눠주었다. 큰 재물을 얻게 된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큰 법당을 짓느라 5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마지막날 기와를 덮던 와공이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높은 지붕에서 떨어진 와공의 몸이 마치 기왓장처럼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연이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 동짓달 스무사흗날에 죽었는데, 그날 저녁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연이의 혼이 이 돌부처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공덕을 쌓은 연이가 부처로 태어났기에 사람들은 이 부처를 미륵불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두루 편안하게 해달라고 빈다. 무가의 성주풀이에서도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로 시작하여, 성주의 근원이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라고 한다. 성주라는 것은 민간신앙에서 집집마다 그 집의 부귀영화와 평안을 지켜주는 신을 말한다. 그러한 신의 근본지로 여겨졌다는 것은 민간신앙의 기원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있는 미륵불이니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제비원 미륵불은 그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줄 듯한 넉넉한 품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전설에는 법당과 석불을 도선국사가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도선이 지녔다는 신통력에 기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안동의 얼굴"

[보물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安東 泥川洞 磨崖如來立像) Rock-carved Standing Buddha in Icheon-dong, Andong]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설명]

The body of this huge Buddha statue was carved in a line on a 12.38-meter-high natural rock face. The head was separately placed on top. This method was generally used in the Goryeo Dynasty. The Two Rock-carved Standing Buddhas in Yongmi-ri, Paju (Treasure No. 93) are another example.

The back of the head was almost completely destroyed, but the front is intact. The usnisa (a protuberance symbolizing supreme wisdom), shaped like a topknot, is relatively high, and the long eyes and thick lips are smiling serenely. Despite its huge body, the statue is well-balanced overall. There is a little bit of orange paint left on the head, face, and lips in particular, telling us that this statue used to be painted. The folds in the clothes covering both shoulders look like a graph. The index fingers and middle fingers of each hand are put together, with the left hand on the chest and the right hand on the stomach.

This huge Buddha statue represents the dominant style of folk Buddha statues made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serves as important data in studying the Buddha statue of the time.

출처:문화재청


마애여래입상 오른손 모습이다. 배에 대고 있으며 엄지와 장지를 맞대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각기 사람이 타고난 근기에 따라 천축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중품하생인의 손 모양은 중품의 근기를 타고난 사람을 하생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입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안동이천동삼층석탑 (安東泥川洞三層石塔)]

연미사 뒷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이 탑이 보인다. 함께 있는 거대한 석불상(보물 제115호) 뒷편에 흩어 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으로, 예전에는 이곳이 연미사의 자리였다고 한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꾸밈이 없는 단조로운 모습이며,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솟아올라 가벼움을 이끌어내었다.

주위의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석불상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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