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오죽헌

2022. 4. 11. 06:17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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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Ojukheon House, Gangneung]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영문 설명]

Ojukheon House is a historical site where Sin Saimdang (1504-1551) and her son, Yi I (pen-name: Yulgok, 1536-1584), one of the greatest Confucian scholars in Korea, were born.

Sin Saimdang was both an extraordinary artist and a famous role model as a good wife and wise mother, while Yi I was one of the two greatest scholars, along with Yi Hwang, of the Joseon Dynasty.

Ojukheon House was built by a scholar named Choe Chi-un (1390~1440). It measures three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at the front and two kan at the sides, and has a hip-and-gable roof. The two kan on the left side at the front was used as the main room and the one kan on the right side was made to be a room with Korean floor heating system. The wooden materials that support the eaves of the roof were built in the Ikkong structural style, which has a beak-like decoration that supports the roof’s weight.

Ojukheon House is one of the oldest Korean traditional houses.

출처:문화재청


"오죽헌 입구"


"보호수 수령 570년 강릉 죽헌동 회화나무"

산림청 이야기가 있는 보호수 100선 강릉 죽헌동 회화나무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 탄생지, 오죽헌"

오천원권의 율곡 이이, 오만원권의 신사임당 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 화폐의 인물로 다시 태어나다.


"율곡 이이 동상"

見得思義(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것인가를 생각하라)


"모자 화폐 포토존과 자경문"


"백목련과 명자나무"


"오죽헌 안내도"


[자경문(自警文)]

자경문은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문이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윈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에 뜻을 두고 일 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문은 '국보 강릉 임영관 삼문 '과 같은 모양으로 1976년4월에 건립되었다.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


"오죽헌 전경"


"박정희 대통령 식수 주목"


"산 주목과 죽어 가는 율곡매"


[사임당 배롱나무]

강릉시의 시화(市花)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으로 나이가 600살이 넘는다. 신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 나무는 율곡송(栗谷松)과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율곡송(栗谷松)]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君子) 식물이다. 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율곡 선생은 「우송 당기(友松堂記)」 에서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天功)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길 줄 모르는가!" 라고 했다.


[문성사(文成祠)]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御製閣)이 있었으나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대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政事)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율곡매와 오죽헌"


"오죽헌, 몽룡실"


"보물 강릉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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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강릉 오죽헌 율곡매]

2017년부터 갑자기 수세가 약해지기 시작하여 2021년 사실상 고사판정을 받으며 천연기념물 해제 위기도 있었으나 잔존수명을 늘려 가던 율곡매에 연분홍 꽃이 피웠다는 2022년 3월 29일 뉴스 기사를 보고 2022년 4월 6일 오죽헌을 찿았다. 

연분홍 꽃들은 이미 다 져버렸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보다가 고개를 올려 자세히 살펴보니 어린 가지에도 한두개 정도의 꽃이 보였다. 죽은 굵은 가지에서 자란 잔가지에서 꽃을 피운 흔적과 연녹색 잎들이 600년 이상을 피고 진 노거수의 강인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느끼게 하였다.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율곡매는 생육환경 개선과 뿌리치료 등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율곡매 인근 매화나무가 유전자 분석 결과 친자로 확인함에 따라 내년 후계목 육성사업도 본격적으로 시행한다."고 전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강릉 오죽헌 율곡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먹거리

"신사임당과 율곡의 숨결" [천연기념물 강릉 오죽헌 율곡매 (江陵 烏竹軒 栗谷梅)]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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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烏竹)]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색이어서 오죽이라 불린다. 다년생 초본으로 죽순은 5~6월에 나오는데 첫해 초록색이었다가 다음해에 검게된다. 60년을 살고 꽃이 피면 죽는다.


"사랑채와 안채"


[운한문(雲漢門)]

운한문은 막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어제각을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어제각과 함께 정조 12년(1788) 지금의 문성사 앞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 이 자리로 옮겨와 복원되었다.

정조대왕이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 과 벼루를 궁으로 가지고 오게 하여 직접 본 후 잘 보관 하라며 돌려보내자, 당시 강원도관찰사 김재찬, 강릉부사 맹지대가 어명을 받들어 어제각을 지었다.

'운한(雲漢)은 은하수를 뜻하며 『시경(詩經)」의 대아편(大雅篇)에 나오는 "탁피운한 위장우천(倬彼雲漢 爲章于天) 밝은 저 은하수, 하늘에 둘러 있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대왕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쓰였다.

운한문의 글씨는 어제각을 건립할 당시 썼을 것으로 보이나 작자는 알 수 없다. '문(門)'자는 중국 송대 왕희지(王羲之)의 초서체를 본받아 쓴 글씨이다.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 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이다.


"율곡선생 행장기, 율곡기념관"


"신사임당 가계도, 겨레의 참 스승 율곡 이이"


[율곡친필 암석각자]

성동린우 애지산학(性同鱗羽 愛止山壑 /성품이 물고기나 새와 같아 사랑은 산과 골짜기에 머무르리, 이이가 자신의 생애를 물고기나 새처럼 때 묻지 않은 자연에 비유)


[강원도 유형문화재 신사임당초서병풍 (申師任堂草書屛風)]

이 병풍은 신사임당(1504∼1551)이 초서로 쓴 오언절구의 6폭 병풍이다.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초충도, 노아도, 요안조압도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것은 신사임당의 이종 손녀가 최대해에게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이웃 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강릉 부사 이향달이 듣고 주선하여 도로 찾았다. 그 후 강릉시 두산동의 최돈길가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을 1971년 강릉시가 인계받아 율곡기념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여기에 쓰인 신사임당의 글씨가 각판되어 오죽헌에 있다. 이 각판은 고종 때의 강릉부사 윤종의가 병풍의 글씨를 베끼어 따로따로 각판을 만든 것으로 이 각판에서 많은 탁본을 만들었다. 또한 이 병풍에는 부사의 발문이 따로 붙여있는데 병풍이 전하여 오게된 연유를 적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여성의 꿈을 그리다 신사임당"


[오죽헌도, 김경수(대한제국 1902년)]

오죽현은 최응현의 고택 가운데 별당 건물인 오죽헌을 포함한 사랑채, 안채, 어제각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별당 건물 오죽헌의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 해서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어제각인데 오죽헌 정화시업 때 헐렸다가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 복원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문성사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이씨분재기 (李氏分財記), 복제품]

신사임당의 어머니이며,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모셔져 있는 최응현 선생의 외손녀인 용인 이씨 부인이 5명의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재산분재 기록문이다.

한지 두루마리로 되어 있으며, 한문 원문에 이두로 토를 달았다. 이렇듯 재산상의 문서나 법률서에는 한문 원문을 끊어 읽는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이두로 한문의 끝 부분에 토를 달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 문서는 조선시대 재산분배에 대한 원칙과 상속대상 등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입지문(立志門)]

이 문은 오죽헌의 남문으로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 장인 「입지장(立志章)」에서 따온 이름이다. 『격몽요결」은 율곡이 42세(1577) 때 해주 석담에서 저술한 책으로 초학자들에게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유학의 입문서이다. 책의 이름은 몽매함을 물리치는 요긴한 비결이라는 뜻이다. 율곡은 「입지장」에서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맨 먼저 뜻부터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도 성인(聖人)이 되리라고 마음먹어야 한다."라고 했다. 학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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