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05:21ㆍ바롱이의 쪽지/강원도
"조선 6대 비운의 왕 단종, 영원한 휴식처"
[사적 영월 장릉 (寧越 莊陵) Jangneung Royal Tomb, Yeongwol]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영월 장릉은 2009년에 조선왕릉 40기가 능원공간의 조형형식의 변화와 산릉제례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 시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문 설명]
This is the tomb of King Danjong, the sixth king of Joseon.
King Danjong was unseated by Prince Suyang and was banished to Yeongwol when an attempt by loyal vassals to return the throne to him was revealed. He passed away while in exile. Out of fear of incurring the wrath of King Sejo, everyone hesitated to hold a funeral for King Danjong except a brave man named Eom Heung-do. It was after the reign of King Jungjong that the vassals started discussing a memorial service for Danjong.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the stone figures were raised around the tomb. Following an attempt to raise his title to Prince in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ukjong, the throne of King Danjong was restored, and his tomb was designated as a royal tomb after 17 years.
With the absence of the stone screen and the balustrade, the tomb is simple in style and was constructed to have petite stone figures as a small tomb. This tomb introduced the lantern with rectangular ceiling for the first time. In particular, this tomb has mortuary tablets for the vassals who were faithful to King Danjong even at the risk of their lives. Only this tomb has monuments such as Jeongnyeobi (stele for filial devotion), Gijeokbi (memorial stone), and pavilion; everything here is related to the life of King Danjong, who lost his throne and passed away.
출처:문화재청
"보호수 수령 400년 영흥리 갈참나무"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박충원 낙조비각]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 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충신 박종원은 중종26년(153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후에 문경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 11년(1516) 노산묘를 찿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찿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
"단종역사관"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증서"
"일월오봉도와 어좌"
"조선왕실 계보도"
"단종의 탄생"
"정순왕후 금보 복제, 단종 금보 복제"
"청령포"
"엄흥도 정려비, 단종비"
"200년의 세월에 예를 갖추다"
"단종복위와 장릉"
"정순왕후 사릉"
"단종대왕 영정"
"충절의 땅 영월"
"단종을 생각하며 시조를 짓다-왕방연"
"단종의 유뱃길에 스민 이야기"
"장릉 가는 길 솔숲"
"정령송"
"돌탑과 장릉"
"소나무와 돌탑"
[보호수 수령 370년 느릅나무와 장릉]
박충원 정여각, 엄흥도 정여각, 단종으로 인하여 순절하거나 희생된 충신·종친·시종 들의 위패를 공동으로 모신 충신각, 제사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 제사 지낼 때 더 물이 풍부해지는 우물 영천, 제사를 지내는 중심 건물인 정자각, 단종의 생애를 기록한 단종 비각 등이 장릉 입구에서부터 왕릉이 있는 곳까지 차례로 늘어서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적 영월 장릉]
장릉은 조선 시대의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문화제로서 제향이 거행되는 조선 시대 왕릉은 장릉뿐이다. 둘째, 조선 시대 왕릉은 서울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관례인데, 그 관례를 깬 유일한 왕릉이다. 셋째,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산줄기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넷째, 규모는 크지 않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경기도 여주의 영릉(세종 대왕릉)과 더불어 으뜸으로 꼽힌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장릉]
장릉은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 기슭에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묘는 서울 쪽, 곧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묘를 둘러싼 소나무는 모두 묘를 향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진 것이 많아 더 애틋해 보인다. 묘 앞에는 칼 든 자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므로 무신석 없이 문신석만 서 있는데, 그 표정도 구슬프다. 묘 뒤쪽으로는 반달 모양으로 담장을 둘렀다. 진흙을 발라가며 전(塼,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은 그 정연한 모습하며 기와 아래 바깥쪽 담에 화강암으로 별을 수놓듯 장식한 꽃담이 퍽 아름답다. 최근 시멘트를 발라 보수해놓은 담장 일부분과 옛 담장이 나란히 잇닿아 있어 담장에 쏟은 예와 오늘의 마음씀새가 미감(美感)으로 비교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장릉 파노라마 전경"
[장판옥]
단종으로 인하여 순절하거나 희생된 충신·종친·시종 들의 위패를 공동으로 모신다.
[배식단]
단종제향과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한다.
"홍살문과 장릉"
"보호수 수령 370년 영월 장릉 느릅나무"
"신도와 왕로"
"단종 비각과 조선국단종대왕장릉"
"정자각.배위청"
"우물 영천과 보호수 느릅나무"
[우물 영천]
이 영천은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m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 있고 상부는 정방향이다.
"엄흥도 정려각"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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