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완성_2020년 8월(Vol. 1)

2020. 8. 15. 14:34뚜벅뚜벅 여행의 완성/여행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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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행의 완성_2020년 8월]

[프롤로그]

8월은 24절기 중 가을로 접어듬을 알리는 입추(立秋)와 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오기 시작하는 처서(處暑)가 있는 달이다.

24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인 입추(立秋)는 양력으로는 8월 8일 무렵이고, 음력으로는 7월이다. 대서(大暑)와 처서(處暑)의 사이에 들어 있으며,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기도 하고 장마, 태풍등의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서서히 가을채비를 준비해야 할 절기이다.

24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인 처서(處暑)는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드는 절기이다. 입추 무렵까지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이면서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기운을 느끼게 되며 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이 만나며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의 기운을 받아 만곡이 풍요롭고 식재료는 달큼함의 절정에 이르는 8월이다.

전남 담양 식영정과 분홍색 꽃이 활짝 핀 배롱나무


강원 양구 해바라기가 있는 원두막, 해바라기와 원두박


[여행]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

뚜벅뚜벅 아름다운 우리땅을 여행하며 삶의 체취와 역사의 흔적이 서린 문화유산을 만나다.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_8월, 비자나무]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침엽 교목이다. 

나무 크기가 8~15m, 직경이 50~120cm로 수령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 300년에서 500년쯤으로 추정된다. 과거 제주에는 삼별초의 난을 비롯해 4 · 3사태 등 많은 역사적 소용돌이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비자숲이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비자나무는 척박하고 건조한 곳을 매우 싫어하며, 내음성이 강하지만 생장은 아주 느린 편이다. 암나무와 수나무가 다르며, 4월에 꽃이 펴서 열매는 이듬해 가을에 익는데, 아몬드 같이 생겼다. 씨가 떫으면서도 고소해 술안주 등으로 먹기도 하나 독성이 있어 주의해야 하며 옛날에는 회충, 촌충 등의 구충제로 쓰였다. 비자나무 목재는 향기가 나고 탄력이 있어서 귀하게 쓰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둑판이다. 값이 비싼 최고의 명반이며, 습기에도 잘 견디어 관재 또는 배의 중요한 부분을 만드는 재료로 쓰는 목재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원나라 궁궐 축조에 우리나라에서 목재를 세공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영조 39년에는 제주도에서 조정에 바치는 비자나무 목재량이 많기 때문에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하니 그것을 줄여 달라는 기록도 있다. 제주도와 남해안 섬지방과 육지에는 전라도 백양산, 내장산 지역이 분포 한계선이라고 볼 수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곳의 숲을 제외하고는 이제 찾아 보기 힘들다. 비자나무의 잎은 납작하고 끝이 침처럼 날카로워서 개비자나무의 부드러운 것과 구분된다.

가을에 익은 종자를 노천매장 후 이듬해 봄에 파종하면 발아되는데, 비음시설을 해 줘야 한다.

출처:우리 생활 속의 나무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 수령 800년이 넘는 새천년 비자나무



전남 화순 개천사 비자나무 숲 최고수령 420년 비자나무


전남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열매, 변비와 구충제로 쓰인 열매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비자나무(숲)]

비자나무(숲)은 현재(2020년 8월) 비자나무 3곳, 비자나무 숲 5곳이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1. 천연기념물 제39호 강진 삼인리 비자나무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강진 삼인리의 비자나무는 나이가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1.5m, 가슴높이 둘레 5.8m의 크기이다. 지상 1.5m 부근에서 커다란 가지가 넷으로 갈라졌다. 이 나무가 500여 년(지정일 기준) 동안이나 벌채를 피해 자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태종 17년(1417)에 이 곳에 전라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의 쓸만한 나무는 모조리 베었으나, 당시 이 나무는 키가 작고 휘어서 건축용 목재로 부적당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되었으리라는 견해와, 둘째는 당시 이 나무의 열매는 기생충을 구제하는 유일한 약이었기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왔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음력 1월 15일에 나무 주위를 돌면서 마을의 평안을 빌고 있으며, 한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는 피서처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삼인리의 비자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역사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강진 삼인리 비자나무 


2. 천연기념물 제111호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서 마을 주변에 많이 심으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임회면의 비자나무는 나이가 600년(지정당시)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2.0m, 가슴높이 둘레 6.35m에 달한다.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쉼터 역할도 한다. 이 비자나무는 1,000년 전에 세워졌던 구암사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는 일이 없었다고 믿고 있다.

임회면의 비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쉼터로, 또는 구충제를 얻는 자원으로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3. 천연기념물 제153호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 주변에 8∼10m에 달하는 비자나무 5,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숲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현재는 이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내장산에서도 비자나무 숲이  발견되었다.

이 숲이 형성된 유래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각진국사(覺眞國師)가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던 비자나무 열매로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절 주변에 심었다고 하며,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스님들은 열매를 거두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우리 선조들이 비자나무 열매를 의약재료로 사용한 생활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비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숲이므로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


4. 천연기념물 제239호 고흥 금탑사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피고, 길고 둥근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 숲은 천등산 중턱에 있으며, 금탑사가 세워진 선덕여왕 6년(637)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높이는 10m 정도이고 모두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흥 금탑사의 비자나무 숲은 금탑사와 관련되어 심어진 것으로 보여 조상들의 문화생활 일면을 볼 수 있는 오래된 인공림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고흥 금탑사 비자나무 숲 


5. 천연기념물 제241호 해남 녹우단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넓게 피고 열매는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맺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해남 연동리의 비자나무 숲은 해남 윤씨 시조의 사당 뒷산에 있으며 나무의 나이는 530년 정도로 추정된다. 윤씨의 선조가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숲의 보호에 힘썼으므로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남 연동리의 비자나무숲은 우리 조상들이 조성한 인공숲으로 문화적·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해남 녹우단 비자나무 숲


6. 천연기념물 제287호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사천 성내리의 비자나무는 나이가 300년 정도된 것으로 추정(지정일 기준)되며, 높이 19m, 둘레 3.85m로 가지는 사방으로 뻗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곤양군청사의 정문에 위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은 곤양면사무소 안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암나무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일부 가지에 수꽃이 달린다고도 한다. 약 10m쯤 떨어진 곳에 작은 수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천 성내리의 비자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


7. 천연기념물 제374호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며,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넓게 피며 열매는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맺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이 비자림지대는 평대리에서 서남쪽으로 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총 2,570그루의 비자나무가 심어져 있다. 나무들의 나이는 300∼600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자나무 숲은 옛날에 마을에서 제사 지낼 때 쓰던 비자씨앗이 제사가 끝난 후 사방으로 흩어져 뿌리를 내려 오늘날의 비자숲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비자가 예로부터 약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잘 보존되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비자림지대는 비자나무 숲으로는 그 규모가 세계적으로 크고 학술적인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


8. 천연기념물 제483호 화순 개천사 비자나무 숲

비자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열매는 약제(구충제 등)와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 이용하였고, 목재는 재질이 좋아 각종 가구재로 사용하는 등 귀하게 여겼던 유용한 나무임.

화순 개천산과 천태산, 개천사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자나무 숲은 과거에 사찰 주변에 식재 조성했던 비자나무가 확산된 것으로 보이며 분포면적, 분포본수, 생육상태 등이 매우 양호한 군락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며, 생장이 느린 비자나무로서는 규모와 발달정도가 우수함.

특히, 개천사 북쪽의 비자나무 1주는 수령이 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수고 16.0m, 흉고둘레 3.5m에 달하고 수관폭은 18.4m에 이르는 노거수로 보존가치가 높음. - 출처:문화재청

화순 개천사 비자나무 숲


[대한민국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이란(World Heritage)?]

「세계유산협약」(1972)에 의거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 유산으로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됨. 출처:문화재청

[세계유산현황]

2019년 7월 현재 세계유산은 전 세계 167개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총 1,121점(2019년 등재기준) 가운데 문화유산이 869점, 자연유산 213점, 복합유산이 39점이다. 한편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에는 총 53점(2019년 등재기준)이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 ·불국사(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년)’, ‘한국의 서원(2019년)’으로 총 14점이 있다.(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뚜벅뚜벅 대한민국 세계문화유산_8월,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2010)]

[요약]

14세기~15세기에 조성된 하회(河回)마을과 양동(良洞)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씨족 마을이다. 숲이 우거진 산을 뒤로 하고, 강과 탁 트인 농경지를 바라보는 마을의 입지와 배치는 조선 시대(1392~1919) 초기의 유교적 양반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옛 마을은 주변 경관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자양분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는 종가와 양반들의 기거했던 목조 가옥, 정자와 정사, 서원과 사당, 옛 평민들이 살던 흙집과 초가집 등이 있다. 17세기~18세기의 시인들은 정자와 쉼터에서 마을을 둘러싼 강과 산과 나무의 경치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를 지어 노래했다.

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한국의 역사마을 : 안동 하회마을


한국의 역사마을 : 경주 양동마을


[영문명]

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ng


[등재기준]

기준 (ⅲ) :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대표적인 씨족 마을의 예로서, 조선 시대 초기의 특징인 촌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입지와 배치와 가옥의 전통에서 두 마을은 500여 년 동안 엄격한 유교의 이상을 따라 촌락이 형성되었던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기준 (ⅳ) : 하회와 양동 두 마을은 한반도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조선왕조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양반과 평민 가옥들의 전체적인 배치와 개별적 배치의 조화는 조선왕조의 힘과 영향력이 문학과 철학적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문화적 전통에도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500년 동안 조선을 통치하였던 양반들의 문화가 꽃핀 한반도의 남동부 지역에 있다. 두 마을은 거리상으로 90㎞ 정도 떨어져 있다. 두 마을은 14세기~15세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19세기 후반에는 규모도 커지고 구성도 확대되었다. 두 마을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 마을 입지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이고, 지역의 기후 조건에 적합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맞는 가옥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에는 씨족 마을의 대표적 요소인 종가와 양반들이 살았던 크고 튼튼한 목조 가옥, 정자와 정사, 유교 서원과 서당 등이 남아 있다. 또한 평민들이 살았던 단층의 작은 흙집과 초가지붕을 얹은 초가집들도 있다. 정자와 휴식처에서 보이는 마을 주변의 산과 나무, 강의 경치는 17세기~18세기 시인들이 시로 읊었을 만큼 아름답다. 두 마을의 전통 가옥들과 마을의 입지와 배치가 이루는 탁월한 조화는 조선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잘 보여 주는 사례로 꼽힌다. 특히 씨족 마을의 형성이라는 특징적인 체계는 이 지역에 고유한 것으로 500여 년 동안 발전되어 왔다.


[완전성]

씨족 마을의 대표적인 구성 요소인 양반의 가옥과 평민의 가옥, 공간 배치의 형식, 서당과 서원 등이 유산으로 등재된 이 두 마을에 있다. 하회마을에는 동쪽 4㎞ 지점에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고, 양동마을에는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동강서원(東江書院)이 마을에서 각각 8㎞, 4㎞ 떨어진 곳에 있다.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강과 숲, 산이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경관은 하회마을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양동마을에서는 그 완전성이 약간 떨어진다. 양동마을에 흐르는 안락천 개울과 수운정(睡雲亭)에서 바라보이는 안강평야와 산등성이는 등재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유산은 최소한의 부작용 외에는 개발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으며, 방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양동마을의 환경은 다리와 도로, 철도 등의 새로운 사회기반시설의 건설로 일부 훼손된 바 있다.


[진정성]

씨족 마을의 요소들이 보여 주는 보편적 가치는 가옥과 마을 배치의 우수성과 관련되어 있고, 주변 환경과 씨족 마을의 의식은 유교 전통에 의해 형성된 조선 시대 정치 체제와 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이 마을들이 위계에 의해 형성된 촌락의 배치와 영향력 있는 씨족과 학자들의 표상을 잘 보여 주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복원할 때 쓴 재료로 인해 유산의 진정성이 약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회마을에서 건축물의 일부를 새롭게 이용하기 위해 재료를 바꾸었는데, 이러한 변경은 때때로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조선 시대의 재료와 기술, 배치, 건축물의 우수성을 흐리게 한다.


[본문]

씨족 마을이 융성했던 조선왕조는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며 한국 사회에 유교적 이상을 실현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한국 전통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풍수지리에 따라 지역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마을이 형성되는 풍습은 그 이전 고려 시대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주들과 향촌 관리들인 양반이 유교적 풍습에 따라 새로운 마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마을을 조성해 나간 것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보통 씨족 마을에는 한 성씨 또는 두 성씨의 양반들이 성곽을 쌓아 마을을 지키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비롯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씨족 마을에서 문관과 무관이 배출되기도 했다.

하회마을은 고려 시대 말에 허씨와 안씨, 그리고 류씨 성의 세 씨족이 새로운 양반 정주지를 찾아 형성한 마을이다. 16세기 말에 류씨 가문은 걸출한 정치가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이는 마을의 건축물, 특히 정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후 마을은 번성했으나 17세기 말에 허씨와 안씨 일가가 마을을 떠나면서 류씨 단독의 씨족마을이 되었다. 마을은 18세기~19세기까지 계속 커져 갔다. 1980년대에 들어와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1991년에는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전통 가옥 두 채가 새로 지어지면서 이런 추세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양동마을은 이씨와 손씨 씨족의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로 성장한 정주지의 예이다. 이 두 씨족은 16세기에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은 두 씨족의 일가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20세기 초, 마을에 철도가 건설되고 학교가 지어졌다. 1940년대에는 사찰이 세워졌고 10년 뒤에는 교회도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안락천에 다리가 놓이고, 1971년에는 안강평야의 농경지를 재정비하여 마을의 공동 저장고를 지었다. 1980년대에 이 마을은 한국의 다른 마을들처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지는 않았다.

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관련 이미지]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 2010)


한국의 역사마을 : 양동(Historic Villages of Korea : Yangdon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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