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관광9경 제4경, 운문사

2024. 1. 20. 06:27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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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발 운문사행 3번 버스를 승차한다.


진한 솔향기가 진득하게 풍기는 운문사 솔바람길을 걸어 운문사로 향한다.


 호거산 운문사 범종루서 바라본 경내의 모습이다.


[청도 호거산 운문사]

 

운문사는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신라 진평왕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 ) 귀산(貴山)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일대를 평정하였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태조 20),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한다.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고려 숙종10)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이 3 중창한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인조7) 년부터 절에 머무르실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곳에서 일연은『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4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최고에 이른다.

 

5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고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내원암·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 금당을 중건하였다. 1958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260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있으며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천연기념물 180호인 처진소나무 30여동의 건물 7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출처:청도군


[천연기념물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淸道 雲門寺 처진소나무Weeping Pine Tree of Unmunsa Temple, Cheongdo]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희귀하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9.4m,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운문사는 1,400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나이는 400 정도로 추정된다.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Stele of State Preceptor Woneung at Unmunsa Temple, Cheongdo]

 

운문사에 있는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 배워 귀국하였다. 1109 선사(禪師) 되었고, 인종 22(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비받침, 비몸, 머릿돌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 이후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원응국사비 정면]

 

글은 윤관(尹瓘) 장군의 넷째 아들이며 당대 일급의 문사로 재상을 지낸 윤언이(尹彦?, 1090~1149)가 짓고, 글씨는 비의 파손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고려왕조 제일의 명필로 꼽히는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69~1158)이 썼다는 데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국사가 입적한 이듬해 인종이 윤언이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비신의 앞면 위에는 세로로 ‘圓應/國師/碑銘’(원응/국사/비명)이라는 제액(題額)이 해서체의 글씨로 양각되었으며, 본문은 왕희지체의 행서로 흐르는 물처럼 생기 있고 잔잔하다. 뒷면에는 문도들의 법계와 이름이 해서로 새겨져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만세루]

 

정면 7칸 측면 4칸에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로 평면이 164평이나 되어 운문사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이다. 낮은 기단에 건물의 바닥도 다른 누각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바닥은 전체를 우물마루로 깔고 사방을 틔워 아주 넓어 보인다. 덤벙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창방을 끼우고 굽이 낮은 주두를 놓은 뒤 2단으로 익공을 짜 올렸다. 겹처마에 추녀 끝에는 네 귀에 모두 활주를 세워서 지붕을 받쳤다. 기둥을 비롯한 부재들이 빈약하고 가구 수법도 일반적인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 천장을 보면 서까래 사이로 산자를 엮은 것이 그대로 드러나 보여 마무리가 덜 된 인상을 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만세루 천장은 산자서까래 위에 기와를 잇기 위하여 가는 오리나무나 싸리나무 또는 가는 장작 따위를 새끼로 엮어 대었다.


"만세루에서 바라본 대웅보전과 범종루"


[작압전]

 

보양스님이 복원하여 운문사의 뜰 가운데 서 있던 대작갑사의 오층전탑 혹은 모전석탑이 1718년 이전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라고 불리다가, 그뒤 다시 목조건축과 탑의 혼합형 건축인 작압전으로 변하였고 1941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의 자취마저 잃고 자리까지 바뀐 채 지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목조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작압전 작은 법당에는 운문사가 부침해온 역사가 압축되어 담겨 있고, 우리가 대하는 한 유물이 처음 모습과 얼마나 달라질 수 있고 또 상상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도 얼마나 끈질기게 애초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작압전 옛모습]

 

1941년 이전의 모습이다. 전탑이나 모전석탑의 탑신 위에 목조건물인 맞배지붕이 얹혀져 있다.

 

글, 사진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청도 운문사 석조사천왕상 (淸道 雲門寺 石造四天王像Stone Reliefs of the Four Guardian Kings at Unmunsa Temple, Cheongdo]

 

사천왕석주는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方位神)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이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淸道 雲門寺 石造如來坐像Stone Seated Buddha of Unmunsa Temple, Cheongdo]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 모셔져 있는 높이 0.63m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광배(光背) 대좌(臺座)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오똑한 ·작은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내의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불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석조사천왕상 우측]

 

동방지국천왕은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서 슬쩍 구부린 두 발로 모로 누운 악귀의 어깨와 엉덩이를 밟고, 왼손은 내려 칼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은 들어 칼날의 가운데를 받치고 있다. 꿈틀거리는 눈썹, 동그랗게 치뜬 눈, 통통하고 볼록한 양 볼을 한 얼굴이 생기에 넘친다. 칼의 손잡이나 날이 신라나 백제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환두대도(環頭大刀)의 그것과 흡사하여 흥미롭다. 서방광목천왕은 가볍게 벌린 두 발로 악귀의 두 어깨를 밟고, 왼손은 쳐들어 불꽃을 잡고 오른손은 내려 넓적다리에 대었다. 갑옷의 무늬가 또렷하여 실물을 보는 듯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석조사천왕상 좌측]

 

남방증장천왕은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두 무릎을 가지런히 굽혀 엎어진 악귀의 머리와 엉덩이를 밟고 섰다. 오른손은 가슴께로 들어올려 삼고저(三?杵)를 쥐고 왼손은 허리에 대어 띠를 잡았다. 조각이 다른 세 상에 비해 얇고 어깨도 처져 있으며 자세도 어딘가 엉거주춤하다. 북방다문천왕은 몸을 오른쪽으로 틀고 다리는 왼쪽으로 튼 어색한 자세로 주저앉은 악귀의 두 어깨를 밟고 있다. 왼손은 어깨 위까지 들어 그의 상징과도 같은 탑을 손바닥으로 받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편 채 그대로 늘어뜨리고 있다. 허리가 잘록하고 얼굴도 젊어 보이는 청년상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청도 운문사 · 삼층석탑 (淸道 雲門寺 ·西 三層石塔East and West Three-story Stone Pagodas of Unmunsa Temple, Cheongdo]

 

운문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삼국유사』를 저술하였던 곳으로, 지금도 안에는 3 석탑을 비롯하여 금당 석등, 석조사천왕상, 원응국사비, 석조여래좌상 등의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보전 앞에 ·서로 있는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이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는데 때에 팔부중상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서 삼층석탑과 오백전"


[보물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淸道 雲門寺 大雄寶殿Daeungbojeon Hall of Unmunsa Temple, Cheongdo]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1718) 있었던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옆면 3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여덟 () 모양을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 여닫이문을 달았다. 안쪽은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

 

건물의 짜임이 조선 중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비로전 앞 문화재 안내표지판에는 ‘대웅보전’이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이는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에 ‘비로전’을 대웅보전으로 사용할 당시에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비로전 내부 전경"


[보물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淸道 雲門寺 毘盧遮那三身佛會圖) Buddhist Painting of Unmunsa Temple, Cheongdo (Vairocana Buddha Triad)]

 

운문사 보광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신불회도는 1755 처일(處一) 주도로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이다. 18세기의 삼신불화는 비로자나와 석가, 노사나를 폭으로 나누어 그리는 3 형식이 유행하였지만, 불화는 거대한 화폭에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삼신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들을 함께 그린 1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물론 1650년에 제작된 갑산 삼신불괘불탱에서 확인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한 형식이다. 특히 보살형의 노사나불은 특유의 설법인을 취하지 않고 연꽃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연꽃을 노사불의 수인은 수도사 노사나괘불탱(1704) 통도사 노사나괘불탱(1792) 괘불화에서 확인될 후불도에서 표현된 예로는 유일하다. 

 

불화는 18세기 작품 삼신불을 화면에 배치하는 드문 형식의 삼신불회도로서 안정된 화면 구성과 균형 잡힌 인물표현, 적색과 녹색이 대비를 이루는 차분한 색감 등에서 18세기 불화의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비로자나불상과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비로전 불단 서쪽의 천장에 걸린 용가(龍架)에 여럿 달린 작은 방울들을 울리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는 앙증스러운 동자상이 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운문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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