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춘천박물관

2024. 2. 28. 05:39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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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춘천박물관]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우석로에 있는 국립 박물관으로 2002년 10월 30일 개관하여 지역문화의 원형과 특성을 찾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연구와 전시 및 교육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지역사회의 관심과 문화수준을 높여주는 곳이다. 넓은 주차장이 준비되어있어, 이용 시에 편리하다.

 

국립춘천박물관은 넓은 주차장과 쉼터가 잘 조성되어있고, 고급스러운 건축물이 아름다운 곳이다. 상설전시실 이외에도 어린이를 위한 공간도 많고, 도서실, 체험학습실 등을 운영하고 있어서 여러 방문객들의 문화 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정갈한 외관으로 맞이하는 국립춘천 박물관의 장엄한 내부는 각종 전시와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출처:춘천시


가장 강한 힘이나 가장 탁월한 지성을 지닌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 찰스 다윈


[전쟁의 아픔이 남겨진 선림원 종]


1948년 양양 선림윈 터에서는 아름다운 종 하나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범종은 신라 804년(애장왕 5)에 제작된 것으로 평창 상원사 범종(725), 경주 성덕 대왕 신종(771)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종입니다. 이듬해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져 보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6,25전쟁 당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되어 버렸고 일부만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선림원 종 조각(이두로 쓴 종을 만든 내력과 비천상) 


[보물 동제 염거화상 탑지 (銅製 廉巨和尙 塔誌) Copper Stupa Record of Buddhist Monk Yeomgeo]

 

이 염거화상탑지는 얇은 동판에 통일신라 선종승인 염거화상이 844년에 전화한 내용을 해서체를 쌍구체기법으로 전각한 것이다. 염거화상(~844)은 진전사 원적선사 도의의 제자로 가지산문의 2대 조(祖)로 알려진 인물이다. 동판에 새겨진 탑지의 내용은 비록 소략하지만 단정한 글씨체로서 당시의 서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며 축조의 정교한 끌 자국은 금속공예 기술의 우월함을 잘 대변해 준다. 무엇보다 이 몇 줄의 명문을 통해 당대 최고의 고승인 염거의 행적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승탑의 효시가 되는 염거화상탑의 축조시기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이미 국보로 지정된 염거화상탑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


홍천 물걸리 절터 깨어진 불상의 얼굴


[보물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原州 鶴城洞 鐵造藥師如來坐像) Iron Seated Bhaisajyaguru Buddha from Hakseong-dong, Wonju]

 

이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까지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읍옥평) 들판에 방치되어 있던 다섯 구의 철불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불상은 전체높이 110cm로 등신대(等身大)에 가깝고, 어깨는 둥글게 처진 모습이며, 신체 비례가 살아있는 사람과 흡사하다.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나말여초기의 불상으로 철불의 제작기법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약사여래의 도상을 알려주며 원주지역에서 유행했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한국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문화재청


[국보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江陵 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 Stone Seated Bodhisattva from Hansongsa Temple Site, Gangneung]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 손가락을 편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어서 같은 곳에서 발견된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과 반대이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국보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사람들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 나왔다. - 이곡 동유기(조선 시대 이곡이 지은 『동유기』(東遊記)라는 책에 의하면 이 절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석상이 있었고, 절터 동쪽에는 4기의 비석과 귀부 등이 있었다고 하며, 또 구전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200여 칸에 이르는 큰 절이었다고도 한다.

 

우거진 숲 속 절터 한쪽에 기와와 그릇 파편들을 모아둔 무더기가 있고, 5층의 층급받침이 뚜렷한 탑의 지붕돌이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으며, 암자가 하나 있지만 어수선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근처에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이라면 바로 절 앞이 바다 모래톱이었을 것이다. 과연 문수와 보현 보살이 동해로부터 와서 이곳에 닿았을 법하다. 또한 서쪽 대관령을 바라보면 보현사의 위치가 짐작되는데, 보현보살이 “한 절에 두 보살이 있을 수 없다” 하며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절을 지어 문수사를 떠났다고 하는 전설이 생각난다. 그 화살 떨어진 곳이 바로 지금의 보현사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국보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고려 시대의 작품이지만 석굴암 감실의 보살상과 같은 통일신라 조각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정교한 작품이다. 높이 92.4㎝로 머리에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얼굴이 통통하고 둥글며 눈은 반쯤 지긋하게 감았는데, 눈꼬리가 길고 눈썹이 깊게 패어 있다. 입술에 붉은 채색을 한 흔적이 보이고, 미소 짓는 입 언저리에서 풍기는 인자함은 신복사터나 월정사의 석불좌상 들과 같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고, 이마에는 백호 속에 박혀 있던 수정이 조금 남아 있다. 손은 크고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는데, 오른손으로는 연꽃을 쥐고 왼손은 검지손가락만 길게 편 독특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목에는 굵은 삼도가 새겨져 있고, 옷주름이 선명하며 넓고 편편한 편이다. 특히 두 다리는 좌서상(左舒相)을 취하고 있다. 반원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이것은 본래의 대좌에 끼워 넣기 위한 심지로 생각된다. 신복사터 석불좌상처럼 연화대좌는 따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보살의 명칭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으며,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창령사 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담은 얼굴"


[국가민속문화재 청풍부원군 상여 (淸風府院君 喪輿) Bier of Cheongpung Buwongun]

 

청풍부원군 상여는 조선 후기 대동법을 시행하였던 김육(金堉)의 아들 청풍부원군 우명(右明 : 1619~1675)이 죽었을 때 시신을 향리로 운구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것이다. 이 상여는 묘소 북방 골짜기에 초가를 지어 보관하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했었다.

 

상여(喪輿)는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밝은 천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몸체에는 봉황머리와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고, 검은 천 위에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려는 의미로 보여진다. 요여(腰輿)는 혼백과 죽은 이의 이름을 적은 위패를 모셔 나르는 작은 가마이다. 긴 멜대 위에 사각형의 방처럼 생긴 몸체를 얹고 맨 위에 네 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구형의 지붕을 올렸다. 명정대(銘旌帶)는 붉은 천에 청풍부원군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깃발로서 상여의 오른쪽에 세워두었다가 시신을 운반할 때 영구 앞에 서서 행차를 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만장대(輓章帶)는 망자를 애도한 글을 적은 깃발로 명정의 뒤쪽으로 배치된다.

 

조선 숙종대에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궁중에서 쓰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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