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속리산 법주사

2020. 9. 13. 11:21뚜벅뚜벅 대한민국 세계유산/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2018)

반응형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ㆍoutstanding universal value)]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하 ‘산사’)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불교 유산이다. ‘산사’를 구성하는 7개 사찰은 모두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 활동,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으며 다양한 토착 신앙을 포용하고 있다. ‘산사’의 승가공동체는 선수행의 전통을 신앙적으로 계승하여 동안거와 하안거를 수행하고 승가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한 울력을 수행의 한 부분으로 여겨 오늘날까지도 차밭과 채소밭을 경영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수많은 불교 사찰들이 창건되었는데, 도시에 세워진 사찰들과 산지에 세워진 사찰들로 나누어진다. 이후 조선(1392~1910)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도시 사찰의 대부분은 강제로 폐사되었지만, ‘산사’를 포함한 산지사찰들은 현재까지 승려들의 신앙과 정신 수행, 일상생활을 위한 승원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특징을 지속하여 왔다. 즉, 도시 사찰은 거의 사라진 반면 산지사찰인 산사들은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처로서의 기능을 확대하고 수행에 필요한 공간과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산사’를 구성하는 7개 사찰은 종합적인 불교 승원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산기슭에 계류를 끼고 입지하여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는 개방형 구조를 나타낸다. 최소 규모로 축대를 쌓아 자연 지세에 순응함으로써 사찰의 건물 배치는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연 순응적으로 사찰의 영역 확대가 이루어져 곡저형, 경사형, 계류형이 대표적인 사찰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탁월한 산지 불교 승원의 사례로 인정되는 7개의 사찰로 구성된 역사적인 유산이다. 이들 사찰은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창건 시기에 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구현하고 있으며 승가공동체를 위한 신앙, 수행, 생활과 관련된 전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모두는 원래의 기능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사찰의 전체 경내가 한국 불교의 개방성에 의해 형성되었고, 불교 성소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갖추고 있다. 


[법주사]

법주사(法住寺)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住] 절’이라는 뜻이 법주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도 같은 내용이 전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 등으로도 불렸던 듯하다.

절이 위치한 속리산(俗離山)은 예로부터 조선8경으로 꼽히던 산인데, 산세의 아름다움도 있었지만 법주사가 자리한 산이었기 때문에 명산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이라 불리어 왔었다고 하는데, 속리산이라는 산 이름 또한 법주사와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766년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의 계시로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던 중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진표율사 앞에서 우는 소들을 보고 달구지를 탄 사람이 신심을 얻어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俗]을 떠난[離] 산이라는 뜻의 속리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 후 진표율사는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方)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 때 진표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자 영심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길상사가 법주사의 전신이라 생각되며 이후 고려 인종(仁宗) 때의 기록이나 조선 전기 1478년에 지어진 『동문선(東文選)』등의 기록에는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법주사는 금동미륵대불로 유명한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속리산 법주사 일원 또한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내암자로는 복천암, 동암, 중사자암, 상고암, 탈골암, 수정암, 여적암, 관음암, 상환암, 봉곡암, 법기암, 보은포교원 등 12개 암자가 있다.

출처: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보은 속리산 법주사


은구석(은구석은 본래 복천암에 있던 돌로 1464년 세조대왕이 복천암에서 기도를 끝내고 병이 쾌차한 후 이에 불은에 감격함과 회춘을 기념하기 위하여 속리산안에 있는 모든 스님을 모아 선언 하기를 이 돌을 줄을 매고 끌고 가다가 힘이 빠져 멈추면 그곳 멈춘 곳까지  산,들,전답, 집터까지 모두 절 소유로 허락 할 것이라 하였고 스님들은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복천암에서 법주사를 거쳐 현 위치에 이르러 돌이 요지부동이었는데 그제서야 세조대왕이 웃으며 사물에는 한도가 있느니라 하며 이만하면 공양미와 식량이 되리라 하였다. 돌을 끌고온 그곳에 돌을 세우고 돌을 세운 곳에서 속리산 쪽으로 전 토지를 절땅으로 내려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짐. 그 후 세운 돌을 은혜를 구한 돌이라 하여 은구석이라 부르고 선돌이 있는 산 모퉁이를 은구모퉁이라 부르고 있으며 1980년의 보수시 두동강이 나 한동안 논두렁에 방치되어 오다가 1993년 은구모퉁이 주변에 은구석공원을 만들고 부러진 은구석을 접합하여 이곳에 세움.)

은구석


"천연기념물 보은 속리 정이품송과 속리산 옛길"


법주사 전도 중 정이품송 부분
1935년 정이품송
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장 김영조 작품 정이품송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
보은 속리산사실기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보물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보은 법주사 전경
1920년대 법주사 전경
보은 법주사 전경


철당간과 석련지
국보 보은 법주사 석련지
국보 보은 법주사 석련지


보은 법주사 석조와 능인전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보물 보은 법주사 철솥


금강문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석옹


보물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과 대웅보전
보물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대응보전 안 보물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보물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원통보전 안 보물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국보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보은 법주사 팔상전"

 

남쪽 팔상도
동쪽 팔상도
서쪽 팔상도
북쪽 팔상도


한국 100대 명수 목욕소
한국 100대 명수 복천암 우물
천연기념물 보은 속리산 망개나무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2018)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