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봉황산 부석사

2020. 9. 14. 03:58뚜벅뚜벅 대한민국 세계유산/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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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보편적 가치(OUVㆍoutstanding universal value)]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하 ‘산사’)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불교 유산이다. ‘산사’를 구성하는 7개 사찰은 모두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 활동, 의례, 강학,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으며 다양한 토착 신앙을 포용하고 있다. ‘산사’의 승가공동체는 선수행의 전통을 신앙적으로 계승하여 동안거와 하안거를 수행하고 승가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한 울력을 수행의 한 부분으로 여겨 오늘날까지도 차밭과 채소밭을 경영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수많은 불교 사찰들이 창건되었는데, 도시에 세워진 사찰들과 산지에 세워진 사찰들로 나누어진다. 이후 조선(1392~1910)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도시 사찰의 대부분은 강제로 폐사되었지만, ‘산사’를 포함한 산지사찰들은 현재까지 승려들의 신앙과 정신 수행, 일상생활을 위한 승원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특징을 지속하여 왔다. 즉, 도시 사찰은 거의 사라진 반면 산지사찰인 산사들은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처로서의 기능을 확대하고 수행에 필요한 공간과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산사’를 구성하는 7개 사찰은 종합적인 불교 승원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산기슭에 계류를 끼고 입지하여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는 개방형 구조를 나타낸다. 최소 규모로 축대를 쌓아 자연 지세에 순응함으로써 사찰의 건물 배치는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연 순응적으로 사찰의 영역 확대가 이루어져 곡저형, 경사형, 계류형이 대표적인 사찰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탁월한 산지 불교 승원의 사례로 인정되는 7개의 사찰로 구성된 역사적인 유산이다. 이들 사찰은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창건 시기에 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구현하고 있으며 승가공동체를 위한 신앙, 수행, 생활과 관련된 전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모두는 원래의 기능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사찰의 전체 경내가 한국 불교의 개방성에 의해 형성되었고, 불교 성소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갖추고 있다.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에 속한 사찰이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鳳凰山)은 산의 지세가 봉황과 닮았다고 하는 뛰어난 길지이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올라서서 바라보면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어 협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부석사는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676년 중국 당나라 유학 후 돌아와 처음으로 지은 절이다. 절 이름을 ‘부석사’라 한 것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대사와 선묘(善妙) 낭자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 또한 전해지고 있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세운 이른바 ‘화엄 10찰’ 가운데 한 곳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사로 여겨졌으며, 창건 이래 의상대사의 법을 전하는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대사는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는 한국 전통건축의 모범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전각이 다 잘 갖추어져 있는데, 각종 전각과 석탑, 석등이 높이를 달리하여 굳건히 있어서 신앙과 수행의 도량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공간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수도처로 유명한 취현암은 최근까지도 선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산내암자로 속해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는 부석사의 유구한 역사를 일깨워준다. 최근에는 사찰 내에 성보전시관이 마련되어 부석사의 귀중한 문화재들 또한 일목요연하게 관람할 수 있다.

출처: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영주 봉황산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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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봉황산 부석사 일주문"

"보물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부석사 은행나무길"

"천왕문"


"부석사 전경"

"부석사 삼층석탑"

"석탑과 범종루"

"삼층석탑, 범종각, 안양루, 무량수전"

"범종각"

"범종각 법고, 목어, 운판"


"안양루와 국보 무량수전"

"안양루"


"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배례석"


"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안양루"


부석(선묘의 이적은 부석사에 터를 잡을 때에 또 한번 일어나게 된다. 의상이 태백산 자락인 이곳을 점찍었으나, 이미 ‘500의 이단의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묘는 이번에는 사방 십 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하였고, 이에 두려움에 떤 무리들이 물러나 마침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묘용이 변해서 떴던 돌이 지금 무량수전 서쪽 뒤에 있는 돌무더기라고 하는데 뒷날 누가 새겼는지 ‘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택리지』에서 이곳의 뛰어난 지리를 논한 18세기의 학자 이중환이 1723년에 와서 보고는 “실을 넣어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막힌 데가 없으니 정말 신기하다”는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뜬 돌인지 아닌지 하는 과학적 결과가 그리 중요한 것이랴. 다만 의상이 이미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 집단과의 갈등이 퍽 심각했고, 의상이 그 세력을 강력한 힘으로 물리쳤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부석 암각자


"선묘각"

선묘각 안의 선묘상(무량수전 동쪽 뒤편에는 숨은 듯이 자리한 선묘각이 있다. 얼른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쉬운데 그 안에는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목숨까지 바친 선묘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예전 선묘상(사진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현재 선묘상


"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현판"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무량수전의 뒷벽"

"문틀에 달려진 널판문"


"국보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보물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국보 영주 부석사 조사당"

선비화(동쪽 창 밑에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仙扉花)라고 전한다. 학명으로는 골담초(骨曇草)라고 하며 “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한다”고 이중환의 『택리지』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꽂은 바로 그 나무인지야 알 수 없다. 퇴계 이황은 이 선비화를 보고 「부석사 비선화시」(浮石寺 飛仙花詩)를 남겼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을 비겼는데
석장이 꽃부리로 화하였다고 스님이 일러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조사당 내부에는 의상대사상을 모시고 일대기를 그린 탱화를 걸었는데 다 20세기 들어서 조성된 것들이다.

조서당 내부 벽화


"단하각(쥐 한 마리를 무릎에 앉힌 나한상)"

"자인당,응진전"

"보물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와 중앙 보물 영주 북지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2018)"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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