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먹거리

2021. 1. 9. 07:06뚜벅뚜벅 대한민국 국보/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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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소박하고 큰 맛"

[국보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영문 설명]

Originally named Haeansa, Eunhaesa Temple is said to have been built in 809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Heondeok of the Silla Dynasty). It was renovated numerous times due to fire. Geojoam Hermitage was constructed much earlier than Eunhaesa Temple, to which it now belongs.

Yeongsanjeon, the main hall of Geojoam Hermitage, was built in 1375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U of the Goryeo Dynasty) in the precincts of Eunhaesa Temple, and houses a statue of Buddha and 526 stone Arhats.

This building measures seven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at the front and three kan at the sides, and has a gabled roof supported by a simple column bracket system. Yeongsanjeon Hall is regarded as an important cultural heritage as it represents the early days of the column bracket style.

출처:문화재청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팔공산 거조사 일주문, 거조암 원경"


영천 팔공산 거조암(거조암(居祖庵)은 영산전과 요사 두 채 그리고 작은 삼층석탑이 들어선 단출한 암자이다. 비록 은해사의 산내암자에 지나지 않으나 그 문화사적 비중은 은해사는 물론 팔공산의 절집 어느 곳에도 첫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이 있고, 후불탱화와 오백나한상이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역사의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의 영향이 적지 않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거조사라는 이름으로 신라 효성왕 2년(738)에 처음 세웠다는 설과 경덕왕(742~764 재위)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지눌이 1190년부터 7년간 머물면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정혜결사를 시작했다. 결사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공동체운동, 종교운동이다. 정혜결사는 개경 중심의 보수화되고 타락하여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이자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이었다.

지눌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그는 결사를 시작하면서 그 취지를 밝힌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통해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선과 교로 나뉘고, 정과 혜로 갈려 그 두 가지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수행이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와 분열을 일삼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자 그 혁신을 위한 실천이기도 했다. 거조암은 정혜결사가 1200년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그 중심 도량이었다.

거조암은 그뒤에도 오랫동안 거조사란 이름으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은해사가 사세를 크게 키우게 되자 다른 산내암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암자의 하나로 바뀐 듯하다. 요즈음은 3일만 지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신도들의 발길이 잦은 나한기도도량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삼층석탑과 영산전"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영산전은 수덕사 대웅전의 뒤를 잇는 백제계 고려 건축이다. 그 동안 고려 말의 건축이라는 의견과 조선 초의 건물이라는 견해들이 오갔으나 해체·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홍무(洪武) 8년(1375)에 건립된 고려시대 건축으로 판가름났다. 이로써 우리는 몇 안 남은 고려건축에 거조암 영산전을 추가하게 되었다.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 위에 올라선 정면 7칸 측면 3칸, 2고주 7량의 맞배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이 7칸 측면이 3칸이지만 그 비율은 3:1로 정면 30m 측면 10m에 이르는 긴 장방형의 장대한 건물로, 정면의 기둥간격이 넓고 기둥길이는 상대적으로 짧아 불전으로는 특이한 모양이다. 정면 일곱 칸 가운데 중앙의 어간만 약간 넓고 나머지 여섯 칸은 너비가 모두 같다. 어간에 3분합 출입문을 달고 좌우 양 끝 두 칸에는 튼실한 붙박이살창을 내었다. 살창은 양쪽 옆면에도 아래위 2단으로 마련했는데, 이런 살창이 붙는 것은 영산전의 묵은 나이를 말해주는 고식에 든다. 벽채는 아무런 칠을 올리지 않은 토벽이며 기둥과 서까래를 비롯한 목재에도 단청한 흔적이 전혀 없어 이른바 백골집 그대로이다.

덤벙주초 위에 약한 배흘림이 있는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단순 간결하여 기둥머리에 2개의 헛첨차를 겹쳐서 내밀고, 그 위에 소로를 놓고 살미첨차를 얹어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제공의 앞부리는 초각하여 날카롭게 하였는데, 수덕사 대웅전 계열의 백제계 고려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법과 형태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영산전 우측, 좌측, 후면 전경"


"영산전 주심포와 붙박이살창"


영산전 현판과 내부 모습(내부의 가구도 명료하고 견고하다. 두 줄로 열두 개의 고주를 나란히 세워 들보를 건너지르고, 고주와 평주는 퇴보로 연결시켰다. 퇴보의 길이가 비교적 길고 대들보와 퇴보의 낙차가 심한 편이다. 이럴 경우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퇴보 중앙에 화반을 놓고 우미량을 걸었지만 영산전에서는 다른 부재를 전혀 덧대지 않았다. 보통 이만한 크기의 건물이면 11량이나 9량 집으로 하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외목도리까지 합쳐 7량에 그쳤다. 종중도리를 생략하고 그에 따라 종보 또한 불필요해진 대담한 수법의 결과이다. 종보가 없으므로 들보 가운데 마루대공을 높직하게 세우고 들보 양 끝에서 솟을합장을 올려 종도리를 받치는 것으로 결구를 마감하였다.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건물 안쪽 끝에 서서 눈을 들어 바라보면 이런 구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리의 수를 줄이는 등 가구를 명쾌하게 짜면서도 힘의 분배를 충분히 고려한 대목의 거침없는 솜씨와 간명한 가구수법이 아주 인상적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영산전 오백나한상(거조암 입새에 재미있는 이정표가 하나 있다. ‘오백나한절 거조암’, 절에서 이런 안내판을 내다 걸 만큼 부근의 민간에서는 거조암보다는 오백나한절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이렇듯 거조암의 대명사가 된 오백나한상이 영산전에 안치되어 있다. 영산전을 짓던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운부암의 영파스님이 오백나한 하나하나의 이름을 적은 사실이 있다 하니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이미 나한상들이 조성되었음은 분명하다. 오백나한이라고 몰밀어 부르지만 정확히는 526구이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얼굴과 머리에 칠을 한 나한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무릎에 올린 양 손으로 점잖게 염주를 돌리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며, 혹은 고요히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혹은 한쪽 어깨를 기울여 옆사람에게 무슨 말을 수군거리기도 하며, 어떤 것은 크게 웃는가 하면 어떤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과 우비고뇌와 어묵동정이 천변만화한다. 그대로 인간세상의 한 축도다.

조각솜씨가 빼어난 것도, 칠을 올린 재주가 남다른 것도 아니지만 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졸렬한 듯 천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종교가 갖는 명랑성이란 얼마나 필요하고 귀한 것인가. 영산전의 오백나한상은 거기에 값하는 보배로운 유산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영산전 오백나한상(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천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돋보이는 나한상들로 자세와 표정이 천태만상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영산탱(‘침착하고 품위 있는 색조’와 변화무쌍한 호분의 하얀 선묘가 그려내는 화품이 이채로운 불화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영천 삼포추어탕(영천 신녕시장 A동에 있는 친절하고 인상 좋으신 모녀분이 운영하는 추어탕집이다. 추어탕, 한우 장터국밥 등이 대표 음식이며 된장찌개, 칼국수, 잔치국수 등 식사류와 오삼불고기, 돼지두루치기 등 안주류도 판매한다. 음식 솜씨가 좋으셔 멸치젓갈 등 반찬도 별도로 판매한다.)


추어탕(반숙달걀프라이, 찐고추, 양념게튀김, 무생채, 사각사각한 무장아찌, 매콤하고 짭짤한 양념에 버무린 녹진하고 부드러운 살의 감칠맛 풍부한 멸치젓갈, 제피가루, 공깃밥, 한소끔 끓인 추어탕 등을 둥그런 상에 담아 내온다.)


추어탕(개운하고 맑은 국물에 칼칼함을 더해주는 고추, 곱게 갈아진 고소한 미꾸라지 살, 부드러운 배추 우거지를 푸짐하게 들어간 추어탕이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맵싸한 초피가루, 다진마늘, 고추는 기호에 맞게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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