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광주박물관

2022. 11. 8. 05:07바롱이의 쪽지/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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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광주박물관]

한국의 전통양식에 맞추어 지어진 국립광주박물관은 현재 지상 2층, 지하 4층의 건물에 3,305m²(1,000여평) 전시실과 넓은 유물보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넓은 야외전시장겸 정원이 박물관을 감싸고 있다. 또한 1996년 12월 착공한 전시실 개보수 및 수장고 신축공사의 완공으로 기획전시실과 불교미술실이 신설되었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시 유물은  호남지방의 선사시대 유물,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걸친 불교미술품과 각종 도자기 등이 있고, 신안 앞바다의 해저유물 등이다. 1층에는 서화실, 기획전시실Ⅰ·Ⅱ, 불교미술실, 2층에는 선사실, 고대실, 고려도자실, 조선도자실, 신안해저유물실이 있고, 야외에는 고려청자가마터, 각 지석묘, 전 보안사지부도, 광주 장운동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07년에는 교육관을 신축하고 어린이 박물관을 신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출처:오매광주


"그대는 서석산 보지 못하였는가?"


"역사문화실 1"


"과거는 살아있다"


"선사시대"


"구석기시대의 석기 제작"


"신석기 시대의 생활도구"


"청동기시대의 마을"


[우리나라 구슬의 첫 모습, 대롱옥]

중앙에 구멍을 뚫은 원통 모양 구슬입니다. 우리나라 구슬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형식입니다. 대부분 벽옥이나 천하석으로 만들었습니다.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등 주로 무덤에서 출토됩니다. 대체로 목걸이로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창동 사람들의 도구"


[나무문짝]

굵기가 40cm를 넘는 느티나무를 깎아 만든 문짝입니다. 두 개로 이루어져 양쪽으로 열리는 문의 한 쪽입니다. 아랫부분이 불에 타서 지금 남아있는 길이는 108.5cm이지만 원래의 길이는 120cm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폭은 37.2cm입니다.

문을 여닫을 때 문틀에 끼워진 상태로 회전하는 고정축이 있습니다. 고정축쪽 길이가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갈수록 경사져 문짝 끼리 만나는 부분이 가장 짧습니다. 문짝의 앞면에는 볼록하게 돌출된 빗장걸이가 있습니다. 빗장을 옆에서 꽂아 넣을 수 있도록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빗장걸이 구멍의 안쪽 면에는 빗장 때문에 닳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검은간토기 광주 신창동 초기철기시대]

초기철기시대에 만들었던 토기입니다. 주로 무덤에 묻혔던 그릇이지만, 농경마을인 신창동유적에서도 많이 쓰였습니다. 광택을 내기 위해 먼저 고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든 다음, 그 표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매끈하게 갈아냈다고 추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실험을 해보니 광물질을 바르고 갈아낸 후 토기를 구워도 원했던 광택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숲에 묻혀 있었던 부분에서는 광택이 잘 남아 있었습니다. 불에 직접 닿지 않는 부분에서 토기 속으로 탄소가 침투될 때 광택이 잘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실험 결과였습니다.


"신창동 사람들의 일상"


[신창동 출토 바퀴]

신창동 그 사람의 마차

신창동에서는 나무로 만든 바퀴통. 바퀴살, 바퀴, 가로걸이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원통형 바퀴통에는 원래 22개의 바퀴살이 끼워졌습니다. 바퀴살의 길이는 약 76.8㎝였으며, 바퀴의 전체 지름은 160m 가량이었습니다. 낙랑의 마차부속품과 비교해 보면 신장동의 바퀴는 수레보다는 마차의 부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같이 높은 권위를 가진 자가 탔던 마차일지도 모릅니다. 이 바뀌는 신장동에서 찾은 바퀴 부속품의 복원품입니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바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바퀴로 '소와 말을 탈 줄 모르며 장례에 써버렸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뒤엎은 중요한 발견이랍니다.

[신창동출토 문짝과 기둥]

소박한 문짝에서 풍요를 읽다

신창동에서 길이 110m, 너비 37m 가량의 느티나무 문짝 하나가 출토되었습니다. 원래는 서로 대칭으로 맞닿은 2매의 나비 모양 문짝을 잡아 당겨서 여는 구조였을 것입니다. 또 문짝 주변에서는 땅에 박혀 있었던 참나무기둥들도 확인했습니다. 즉 기둥 위에 바닥이 땅보다 높은 건물을 세우고 문짝을 단 다음에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원두막을 담은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땅의 습기와 동물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구조이기 때문에 곡식창고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문짝은 신장동에서 찾은 문짝의 좌우 복원품입니다.


[국보 화순 대곡리 유적]

제사와 의례, 권력의 상징

화순 대곡리의 통나무 목관(기원전 3~2세기)에서 수습한 청동기들은 초기철기시대, 제사와 의례를 주관했던 지역 지도자의 상징물입니다.이 시기는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가장 정교한 청동기를 만들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청동기를 가지고, 또 사용한다는 것은 곧 권위와 권력을 뽐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한반도 서북부와 중국 요동지역에는 후기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지만, 아직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타날 마한 문화가 움트고 있었습니다.

팔주령, 한국식청동칼, 쌍두령, 청동도끼, 청동조각칼, 잔무늬거울


"국보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먹거리

"제사와 의례, 권력의 상징" [국보 제143호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和順 大谷里 靑銅器 一括)]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 영산강 구릉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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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사람들의 의례"


[현악기 광주 신창동 초기철기시대]

현악기는 공통부에 맨 현을 타거나 켜서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신창동유적의 현악기는 벚나무를 세로로 잘라 만든 것입니다. 이 악기는 머리 부분인 현정부와 현을 걸어 음을 내는 탄음부, 현을 거는 구멍이 있는 현미부로 이루어졌습니다. 머리 부분에 2개의 구멍이 남아있는데 현고정부인 양이두를 부착하는 부분입니다. 줄의 숫자는 10현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야요이시대의 현악기는 모두 울림을 갖고 있었는데, 신창동 현악기는 울림통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창동 현악기 외에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실물 현악기 자료로는 경산임당의 칠흔과 5~6세기 경의 현악기를 타는 토우, 일본 쇼소인 소장된 신라금 등이 있습니다. 임당 자료는 신창동 출토품보다 약간 작으나 매우 닮았습니다. 한편 대전 월평동에서는 양이두가 출토되었는데, 일본 쇼소인 소장 신라금의 모양과 같습니다. 이러한 양이두는 신라토우에도 보여서, 신창동 현악기에 있지 않은 현고정부를 추정 복원할 때 도움을 줍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현악기


"부채자루"


"신창동 사람들의 무기"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


"삼한·삼국시대"


"독널무덤"


[살포와 권위]

살포는 논의 물꼬를 틀 때 쓰는  능기구입니다. 그런데 충청, 전남, 경북 경남 등 한반도 남부의 왕릉이나 여러 고분유적에서 살포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포가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농사와 권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 살포가 수전 농법의 확산과 관련이 깊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즉 왕은 지역 수장에게 수전 농경 기술을 보급하고, 지역 수장은 왕의 권한을 이어받아 농경사회를 이끌었을 가능성입니다. 요컨대 지역의 수장이 지역 사회를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하는 도구였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현종(재위 1659~1674)이 영중추부사 이경석에게 살포가 달린 지팡이를 내린 사례가 있습니다. 살포는 왕이 지위가 높은 신하에게 하사하는 특별한 농기구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훨씬 훗날의 기록입니다.


[고흥 안동고분]

화려한 관과 신발을 가진 고흥반도의 수장

남해바다를 오가는 배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던 곳, 고흥반도의 한 고분에서 5세기 중엽의 돌덧널무덤(석곽묘)을 찾아냈습니다. 무덤 안에서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금동관모, 금동신발, 금동귀걸이, 청동거울, 철갑옷과 투구, 무기류, 옥 등을 확인했습니다. 이중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백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또 갑옷과 투구는 왜일본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유물입니다. 한 무덤에 이렇게 다양한 문화요소가 담겼다는 것과 바다와 가까운 무덤의 위치는 이 무덤 주인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고흥 안동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

고흥 안동고분에서는 길고 네모난 철판을 가죽으로 이어 만든 갑옷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갑옷을 울산 하삼정, 김해 삼계동, 부산 연산동과 일본 교토 나라지역에서 발견한 바 있습니다. 또 고흥 안동고분에서는 작은 철판 여러 개를 못으로 고정시키고 이마 앞쪽에 넓적한 햇빛가리개를 부착한 투구 갑옷과 함께 있었는데, 이는 일본 사가현 출토품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갑옷은 일본 지역에서의 출토량이 더 많기 때문에, 왜에서 널리 유행한 형식이라고 봅니다. 고흥 안동고분의 주인공이 왜와 교류하였거나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금동관모, 청동거울, 귀걸이, 목걸이, 금동신발


"광주·전남의 고대 토기"


"고대 문화의 형성"


[장고분]

함평 예덕리 신덕 1호분은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장고 모양의 무덤입니다.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의 긴급발굴조사 때 1호분의 원형 봉분 속에서 1기의 돌방무덤을 발견했습니다. 돌방의 안에서는 금동관, 금동신발, 철제 무기류, 철제 공구류, 말갖춤, 은장식 관옷, 구술 등 다양한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함평 예덕리 신덕 1호분에 묻힌 주인공에 대해서 백제인설, 현지인설, 왜인설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백제 문화의 확산"


"역사문화실 2"


"남북국시대"


"산성과 성곽"


"교종사원의 성립"


[보물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求禮 華嚴寺 華嚴石經) Stone Avatamsaka Sutra (The Flower Garland Sutra) of Hwaeomsa Temple, Gurye]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영문 설명]

Seokgyeong, or stone sutra, refers to a Buddhist scripture carved on a stone plate.

This Avatamsaka Sutra is carved on light blue stone. In 677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Munmu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great Buddhist Monk Uisang established Gakhwangjeon Hall in Hwaeomsa Temple at the king’s command in order to keep this stone sutra. At present, there is a painting hanging on the inner wall of Gakhwangjeon Hall; the Stone Avatamsaka Sutra is believed to have been placed originally along this wall. The square stone plates have a groove at the corner, suggesting that these plates were connected to each other.

According to a record, this stone sutra was destroyed, and the color was changed into gray brown color due to fir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in the 16th century. Approximately 9,000 fragments of the stone sutra remain today. The sutra is written in regular script style, which shows close similarity to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for Master Jingam at Ssanggyesa Temple, written by Choe Chi-won in 887 (second year of King Jeonggang’s reign).

This Stone Avatamsaka Sutra is regarded as a symbolic relic of the temple of Hwaeom Order and a valuable material for the research on Buddhist history starting from the late Silla Period.

출처:문화재청


"선종사원의 개창"


"장보고의 청해진"


"견훤과 후백제"

봉황무늬 수막새


[성황신 김총 영정]

우리나라의 여러 마을에는 성황당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고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곤 했습니다. 성황은 대개 마을 수호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순천 김씨의 시조인 김홍(825~)은 신라 왕족으로서 신라 말~고려 초에 순천 지역에 기반을 둔 호족이었습니다. 그는 견훤의 휘하에서 활약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후백제 때 김충은 벼슬이 인가별감에 이르렀고 죽은 후에
에는 성황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영정에서 김충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창을 두 손으로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갑옷과 투구의 모습이 이색적이고 인상이 과장되어 마치 사천왕상을 연상시킵니다. 이는 불교와 무속이 혼합된 조선 후기 민화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이 석등은 간주(竿柱) 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조각된 독특한 양식으로 정사각형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안상(眼象)과 꽃잎 끝이 8각 면을 향하고 있는 연꽃(복연)을 새긴 하대석(下臺石)을 놓았다. 그 위의 간주에는 원형의 팔엽연화석(八葉蓮花石)이 있다. 간주석 대신 사실적으로 묘사된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가슴을 맞댄 힘찬 모습으로 열 여섯 잎의 연꽃이 새겨진 상대석(上臺石)을 받치고 있는데, 뒷발은 받침을, 앞발은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머리는 쳐들어 위를 향하도록 하여 입이 상대석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머리 뒤에 갈기가 있으며, 꼬리는 엉덩이에 말려 있다. 사자의 몸매가 날씬하며, 사지와 근육의 표현이 사실적이어서 사자를 충분히 괄찰한 장인의 작품이다. 그 위에 불을 켜놓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4면에 직사각형의 화창(火窓)을 내었다. 화창 주위는 단을 주어 얕게 팠으며 위에는 3개의 작은 구멍이 있다. 지붕돌도 8각인데 처마 밑은 수평이며 모서리 위는 경쾌한 반전(反轉)이 있다. 정상에는 연꽃 봉오리형의 보주(寶珠)를 두었다.

원래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 내(全羅南道 光陽市 玉龍面 雲坪里 中興山城址; 지금의 中興寺)에 있었는데, 일제시대인 1918년 일본인들에 의해 서울로 옮겨져 경복궁(景福宮)에 세워졌다. 그 후 1959년 경무대(景武臺), 1960년 덕수궁(德壽宮), 1972년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각각 옮겨졌으며, 1986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청(中央廳) 이전에 따라 그곳의 야외 정원에 다시 옮겨 전시되었다. 1990년 8월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호남지방의 반출 문화재를 다시 찾아오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국립광주박물관 실내로 이전복원(移轉復元)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석등은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와 합천 영암사(陜川 靈巖寺)에도 남아있으며, 고려ㆍ조선시대에도 간주석에 사자를 장식한 것이 만들어 졌다.

출처:광주광역시


"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먹거리

"통일신라 대표 이형(異型)석등"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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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키운 땅"


"고려 청자 생산지"


"지역 공동체의 성장"


[영암 성풍사지 탑지석과 사리탑]

성풍사지는 전라남도 영암읍 용흥리에 자리한 절터로, 오층석탑 부재가 무너진 채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면서 탑지와 청자 사리장엄구가 발견 되었습니다. 탑의 기단부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에 '성풍대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절 이름이 '성풍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탑지는 1986년 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1009년이라는 연대와 함께 '영암의 호장 박문영이 석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지역의 지배자였던 호장이 이끌고 다수의 지역민들이 힘을 합친 향도 조직에 의하여 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향도 결사"

영광 입암리 매향비에 적힌 글(탁본)


"고려시대의 불교공예"


[부처 고려]

철로 만들어진 부처의 상입니다. 불상 재료로 철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하대 이후의 불교조각에서 나타난 가장 새로운 점입니다. 철은 구리보다 경제적이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에 철불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이후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철은 구리보다 녹는점이 높아서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주조한 후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철불은 선종 승려들의 유학과 귀국으로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선종 사찰을 중심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 전기까지 선종 사찰 뿐 아니라 여러 사찰에서 널리 만들어졌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극복"


"조선시대 벼슬 대신 문학과 예술에 취하다"


"광주·전남의 유학자들"


"광주·전남의 누정문화"


"차 문화와 초의선사"


[보물 현자총통(1995) (玄字銃筒(1995)) Hyeonja Chongtong Gun]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유통식화포(有筒式火砲)는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로 분리하여 천자문에서 그 이름을 따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이라 붙였는데, 이 것은 그 중 크기가 3번째에 해당하는 중화기이다.

이 총통은 1992년 전라남도 여천시 백도 근방 해저에서 파손된 지자총통, 별승자총통과 함께 끌어올린 것으로, 총 구경 6.5㎝, 전체길이 75.8㎝의 크기이다. 몸체에는 양내요동(梁內了同)이라는 제작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가정을묘명천자총통(보물)을 제작하였던 자이기 때문에, 이 총통의 제작시기도 조선 명종 10년(1555)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7기의 현자총통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화포사 연구는 물론 국방기술문화재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문 설명]

Ignited and fired by hand, the guns were classified into four types according to their size, amount of gun powder used, and firing range. By adopting the head letters from 1000 Chinese characters, the guns were named cheonja, jija, hyeonja, and hwangja. Among them, Hyeonja Chongtong Gun was the third largest.

This gun was excavated from the bottom of the sea near Baekdo Island, Yeocheon, Jeollanam-do in 1992 together with a Jija Chongtong Gun and a Byeolseungja Chongtong Gun, both of which were damaged. The total length of the gun is 75.8 cm, and the muzzle diameter is 6.5 cm. The gun has an engraving of the maker on the body. Since the maker also produced the Cheonja Chongtong Gun (Treasure No. 647), this gun was probably made in the 10th year of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1555) of the Joseon Dynasty.

Among the seven Hyeonja Chongtong Guns remaining today, this gun is the oldest based on its production record and has been well-preserved; thus, it is considered a precious cultural heritage of national defense and a valuable material in studying the development history of Korean artillery.

출처:문화재청


"백자 달항아리"


[보물 심득경 초상 (沈得經 肖像) Portrait of Sim Deuk-gyeong]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이 초상은 동파관에 유복 차림을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 전신좌상이다. 화면 상단에 “定齋處士沈公眞”이라고 예서로 쓰여 있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는 이서 (李漵 1662-1723 )가 지은 찬을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썼으며, 왼쪽 상단에 다시 이서의 찬이 적혀있다. 그리고 우측 아래쪽에 “維 王三十六年庚寅十一月寫時 公歿後第四月也海南尹斗緖謹齋心寫”라고 쓰여 있어 윤두서가 숙종36년인 1710년 11월에 추화(追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이나 의복의 묘사는 다소 과장과 형식화가 엿보이고 있어서 사실적 묘사로서의 초상화의 특징과 유형화된 표현을 위주로 하는 일반 인물화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靑竹畵史)'에 이 초상에 대하여 적혀있는데 친구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리니 심득경 가족들이 이를 보고 모두 울었다고 전한다.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화가인 윤두서가 그린 초상화로서 의미가 크며 회화성도 높은 중요한 작품이다. 

Ο 규격(세로x가로) : 160.3x87.7cm

[영문 설명]

Little is known about Sim Deuk-gyeong (1629-1710) except that he passed the lower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1693 (the 19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n this portrait he is wearing a Confucian scholar’s overcoat and a tiered black horsehair hat and seated on a stool, in a three-quarter view from left. The two colophons, both composed by Yi Seo (1662-1723), reveal that the portrait was painted by Yun Du-seo (1668-1715) in the 11th lunar month of 1710 (the 36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four months after Sim’s death. The colophon at right was calligraphed by Yun and the one at left by Yi himself.

The face and the costume are rather exaggerated and stylized, combining the elements of realistic portrait painting and stylized figure painting. In his book Cheongjuk hwasa (Cheongjuk’s History of Painting), Nam Tae-eung (1687-1740), a scholar and art critic, wrote that Yun Du-seo painted a portrait of his friend Sim Deuk-gyeong after his death, and that everyone in Sim’s family cried when they saw it.

This is an important work by Yun Du-seo, a leading literati painter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shows the high standard of literati painting.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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