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롱이와 떠나요!(1291)
-
보은 추억품은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추억품은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속리산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며 역사와 유적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문화·체험을 하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사내리는 오래전부터 가장 인기있었던 관광지중 하나였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내리를 찾는 관광객은 수학여행객과 신혼여행객이 대부분이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문화들이 생성되었고 이에 관광객들의 연령대와 방문동기 또한 다양해졌다. 과거 최고의 수학여행지였던 속리산 사내리를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모두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즐길 수 있는 '수학여행1번지' 골목길로 조성하였다. 이곳 사내리에서 속리산의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멋진 추억을 만드는 시간여행을 시작해보자. "사내리 숙박업의 원조 새터주막"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속리산 수학여행..
2023.11.12 -
10월 마지막날 만난 어르신
[정이품송 전설과 은구석]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 공원 내 정이품송 마당에 세워진 세조 동상이 하천 건너편 정이품송을 바라보고 있다. 세조 동상 뒤엔 정이품송의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세조와 정이품송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2023.11.11 -
보은 수정 초등학교 법주 분교장 소나무
보은 솔향공원에서 정이품송을 보러 걸어간다. 폐교가 보여 잠시 들린다. 나중에 찾아보니 '수정 초등학교 법주 분교장'이었다. 폐교 주변으로 나무들이 심겨 있는데 보호수 소나무와 노랗게 단풍이 든 느티나무가 눈에 띈다. "보호수 수령 300년 소나무" "보호수 수령 300년 소나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보호수 수령 300년 소나무" "느티나무"
2023.11.10 -
꿈엔들 잊힐 리야 옥천역
"꿈엔들 잊힐 리야 옥천역" [역(驛) 이야기 Station Story] 한국 철도사와 함께 해온 역사 옥천역은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 경부선 개통과 함께 오랫동안 한국의 철도사와 그 역사를 함께 해왔다. 슬레이트 맞배지붕 역사에 이어 오늘날 대리석 외벽의 현대식 역사까지 접근성이 뛰어난 곳에 위치하여 여객 외에도 컨테이너 화물 취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한편 옥천역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기 위한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는데, 민족시인 '정지용'과 그의 시 '향수'를 기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역 광장의 지용시비 등 역 구내는 물론 옥천시내 곳곳에서 정지용 시인의 시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지역 이야기 Local Story] 민족시인 정지용의 '향수'의 고장 고시산, 관성 ..
2023.11.09 -
옥천 청산향교
"옥천군 청산면 벽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옥천 청산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후 효종(재위 1649∼1659)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1966년에 수리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대성전과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토비를 지급받아 운영하였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소장되었던 책은 모두 흩어지고 잃어버려 거의 없는 상태이다. 츨처:문화재청
2023.11.08 -
옥천 정지용생가&문학관
[옥천 정지용 생가]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정경을 오롯이 그려낸 국민시인 정지용. 그의 시 향수가 그러하듯 초가삼간 그의 생가는 그의 삶의 흔적은 질박하게 품어놓는다. 생가에서 한 폭의 맑은 수채화처럼 다가오는 정겨운 시를 기억하며 그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정지용 생가는 해금조치 직후 조직된 '지용회'를 중심으로 그 이듬해 복원했다. 정지용은 6 · 25발발 와중에 행방불명되고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 막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지용회는 해금조치가 있은 후 그의 생가를 허물고 지은 집의 벽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제 표시판을 붙여놓았다. ..
20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