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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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생(落花生) 한 알을 힘껏 씹는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땅콩은 남아메리카를 원산지로 하는 쌍떡잎 식물로 콩과의 일종이다. 한국어 땅콩을 한자로 직역하면 토두(土豆)인데, 대만에서는 땅콩이란 뜻이지만 중국에서 토두는 감자라는 뜻이며 땅콩은 花生이라 부른다. 땅콩을 달리 일컫는 '낙화생(落花生)'에서 '낙(落)'이 생략된 것이다. 땅콩은 꽃이 수정되고 나면 그 줄기가 아래로 자라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어느 정도 깊이에 들어가서야 땅콩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붙은 이름이 낙화생(落花生)이다. 땅콩은 씨방 1개체 당 보통 2개의 씨를 품지만 드물게 3개를 품거나, 반대로 1개만 품은 개체도 있다."고 설명한다. 국군의 날(10월 1일) 밭에서 땅콩 수확을 하는 부모님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땅콩을 캐고 어머니와 나는 흙 사이로 희끗..
2021.08.23 -
청주 고은리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청주 고은리 고택 (淸州 高隱里 古宅)] 철종 12년(1861)에 지은 집이다.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행랑채·광채·곳간채가 있다. 안채를 제외한 이들 건물들은 1930년대에 다시 지은 것이어서 안채에 비하여는 격조가 떨어진다. 집의 앞쪽에 '一'자형의 행랑채와 사랑채가 있고 안쪽에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한다. 광채와 곳간채는 안채의 양 옆으로 각각 위치하고 있다. 행랑채는 왼쪽부터 측간·외양간·행랑방으로 배열되었고 오른쪽 끝에 대문이 있다. 사랑채는 행랑채의 오른쪽에 있는데 행랑채의 댓돌이 낮은데 비하여 사랑채의 죽담이 훨씬 높아서 사랑채가 우람하게 보인다. 사랑채 오른쪽은 언덕으로 연결되며 앞은 넓은 바깥마당이다. 바깥마당은 담장 없이 외부로 개방되어 있다. 큰사랑방·대청·건넌방이 ..
2021.08.21 -
청주 무농정&방정
[충청북도 기념물 청주 무농정 (淸州 務農亭)]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장 대표적인 씨족인 청주 한씨와 관계된 정자의 옛 터이다.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는 폐허화 되고 숙종 14년(1688) 후손 한익저가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었는데, 1949년 후손들이 시멘트로 지었다가 1988년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목조로 다시 세운 것이다. 서쪽에 작은 대문이 있고 4면을 담장으로 둘렀으며 앞뜰 좌측에 무농정유허비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대머리공원과 무농정" "무농정, 석조 쌀가마 표석" "무농정" "무농정" "무농정" "무농정유허비, 무농정재중건비" "청주 방서동 대머리 청주한씨세거지" 사효각(청주한씨..
2021.08.20 -
옥수수와 라면을 끓이며
"슬며시 물러가는 여름을 맛보며" 선택받지 못하고 텃밭에 남은 지질한 옥수수를 쪄 김훈 님의 책을 보며 먹는다. 올여름 마지막 옥수수일듯하다. 흐릿한 옥수수 단맛 속으로 여름이 슬며시 물러가고 있다. "먹고 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悲哀)"를 맛보려는 찰나다.
2021.08.17 -
식욕을 돋우는 여름김치, 오이부추김치
텃밭에서 자란 부추와 오이를 깨끗이 손질한다. 손질한 부추는 먹기 좋은 길이로 썰고, 오이도 썰어 4~6등분을 내서 굵은 소금을 뿌려 절인다. 물에 고춧가루, 멸치액젓, 매실청, 생강가루, 다진 마늘, 새우젓, 찹쌀풀 등을 넣은 양념장을 만든다. 부재료인 파, 양파, 청·홍고추도 썰어 준비해 둔다. "식욕을 돋우는 여름나기용 김치" 오이부추김치(굵은 소금에 절인 오이를 찬물로 한번 헹궈서 물기를 뺀다. 물기 뺀 오이에 약간의 양념장을 넣고 살살 버무리다 준비해둔 청·홍고추, 양파 등 부재료도 넣어 버무린다. 썰어 둔 부추와 대파를 넣고 남은 양념장을 모두 부어 골고루 버무린다. 잘 버무린 김치를 밀폐된 통에 넣어 냉장 보관한다. 칼칼한 매운맛과 감칠맛이 섞인 양념장, 특유의 향과 알싸하고 기분 좋게 씹히..
2021.08.16 -
충북 증평 울어바위&사곡리 우물
울어바위 마을 유래비(울어바위 마을은 이성산 삼봉의 정기를 받고 보광천이 흐르는 청주 충주간 국도변 증평-도안면계에 위치한 500여년 된 곡산연씨 세거지 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을 지나던 어느 대사가 마을 동남쪽 안산 아래에 있는 넓고 큰 바위를 보고 신령한 바위라 하여 명암이란 글자를 새기고 국가에 대란이 있을때 이바위가 울것이라 예언한 뒤로 마을의 이름을 울어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위가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하며 당시 안음현감 연충수께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께도 1910-1926년 36번 국도와 충북선 철도가 놓이면서 바위는 매몰 파손 되었고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4년 인근 마을과 함께 화성리로 편..
2021.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