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300)
-
왕의 물, 전의 초수
"왕의 물, 전의 초수"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6호 전의 초수(전의 초수는 조선의 성군이시며 한글을 창제하여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세종대왕의 눈병을 고친 약수로 「조선왕조실록』제 105권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를 위하여 많은 책을 보다 눈병을 앓았는데 장님에 가깝도록 앞을 보지못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때 어떤이가 와서 아뢰기를 목천, 전의, 청주에 초수가 있는데 물맛이 차고 후추처럼 톡쏜 맛을 내며 눈병치료에 좋다고 아뢰자 우선 사람을 보내여 치료케 하니 효험이 있어 처음에는 청주 초정에 행궁을 짓고 치료했으나 완쾌를 보지 못하고 환궁하였다. 그후 약효가 센 전의초수에 행궁을 짓고 치료하려 하였으나 그해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고초가 심하자 백성들에게 핀해..
2021.06.13 -
세조와 정이품송
"정이품송을 바라보는 세조 동상"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 공원 내 정이품송 마당에 세워진 세조 동상이 하천 건너편 정이품송을 바라보고 있다. 세조 동상 뒤엔 정이품송의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세조와 정이품송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
2021.06.11 -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우리나라 3대불전(佛典)" [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報恩 法住寺 大雄寶殿)]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
2021.06.11 -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
2021.06.11 -
개미와 잠자리
[개미와 잠자리]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 답사 후 법주사로 가는 길 대로변에서 본 모습이다. 죽은 잠자리를 개미 두 마리가 힘들게 끌고 간다. 전선에 잠자리 다리가 걸렸다. 더 힘들게 됬지만 주변에 개미들이 하나 둘 보인다. 도움을 주러 올것이다. 결국엔 죽은 잠자리는 개미의 보금자리로 끌려가 먹이로 이용 될거다. 자연의 순리다. "개미와 잠자리"
2021.06.11 -
은혜를 베풀다, 보은 법주사 은구석(恩救石)
"은혜를 베풀다, 은구석(恩救石)" 세조는 복천암에서 신미대사 등 고승들을 모아 법회를 열고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면서 피부병 치료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어 병세가 호전되자 그는 이를 불은(佛恩)으로 여기고 부처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사찰에 땅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래서 복천암의 모든 스님을 모아 "내 속리산에 와서 병을 쾌차하니 기쁘기 그지 없다. 이 모든것은 부처님의 은공이니 내 이 사찰에 토지를 하사하고자 하노라 이 돌에 줄을 메어 끌고 가다가 힘이 빠져 멈준 곳까지의 산과 돌은 돌론 전답과 집터까지 모두 절의 소유가 되도록 허락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승려들은 사찰을 크게 번영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여 크게 기뻐하고 사내리 방향으로 돌을 끌고 약 6km 아래까지 끌고 내려왔으나 ..
2021.06.10